시는 휴식이 아니다[내가 만난 명문장/김상혁]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7월 27일 2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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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사람을 공원 벤치가 쉬게 할 수 있을까/단 1분이라도”

―김복희 ‘가변 크기’ 중


김상혁 시인
김상혁 시인
시집 ‘보조 영혼’의 첫 작품에서 고른 문장인데 아리송하면서도 매력적이라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뉘앙스로 느껴지는 바 시집을 읽는 사람에게 벤치란 ‘단 1분’의 휴식도 제공하지 못한다. 풍광 좋은 곳에 놓인 벤치에 앉아 시집을 펼쳐 보는 일은 누구나 떠올릴 법한 낭만적이고 여유로운 장면이 아닌가. 그렇다면 저 문장은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일까.

시가 휴식이 아닌 까닭은 세 가지다. 우선 좋은 시는 당연하게도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 지혜롭고 옳은 말이 필요한 사람은 설교를 듣거나 잠언집을 살피면 될 일이다. 하지만 시는 이러저러하게 사는 게 옳다고 점잖게 말하는 대신에 독자를 향해 차갑게 냉소하거나 눈물로 호소한다. 그래도 안 되면 문득 ‘너 그렇게 살지 마’라며 화를 낼지도 모른다. 시는 그렇게 우리 마음을 할퀴며 상처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려 한다.

좋은 시는 독자의 ‘생각’을 널뛰게 만든다. 시집을 읽는 독자의 머리는 도대체 쉴 틈이 없다. 독자는 앉은 채로도 몇 세기 전의 불행에 참여하고 있거나 몇 세기 후의 위기를 가늠해 보는 중이다. 벤치는 대양과 대륙을 오가는 상상력을 전혀 붙잡아 둘 수 없다. 마지막으로 시는 실제로 독자의 ‘몸’을 일으킨다. 그렇게 일어선 그는 곧 벤치에서 벗어나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좋은 시란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기를 멈추지 않기에 독자는 타인의 처지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시집을 읽는 내내 마음과 생각이 들떠 안절부절못하던 그는 이제 외로운 가족과 아픈 이웃에게 손을 내밀러 떠나야 한다. 벤치에 앉아 시를 읽는 시간은 물론 소중하다. 하지만 시집을 들고 매일 편한 벤치만 찾는 독자는 어쩌면 시와 가장 관계없이 사는 사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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