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 시인첫 문장은 단추와 같다. 글이라는 외투 전체를 생각하면 첫 문장은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그 단추가 없다면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는다. 필자는 책을 펼칠 때마다 이야기의 단초가 될 단추를 매만지며, 이 책이 나와 잘 맞을지 아닐지를 세심하게 살핀다. 이 문장은 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에 실린 첫 소설의 첫 문장이다. 책을 펼치자마자 등장하는 문장치고는 알싸하니 맵다. 삶의 진실이 예고도 없이 본편으로 쏟아지는 느낌이랄까.
‘봄밤’은 지방 요양원에서 생활하는 수환과 영경 부부의 삶과 사랑을 다룬다. 수환은 진통제에 의존해야 하는 류머티즘 환자이고, 영경은 극심한 알코올 중독자다. 그렇게 술을 먹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환은 또다시 영경을 배웅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바라는 모양으로 오늘을 살도록.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내가 가진 사랑의 크기를 계량해 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봄밤’의 첫 문장은 도돌이표와 같다. 아무리 부정하고 벗어나려 해도 번번이 그 앞으로 되돌아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삶의 끔찍함과 위태로움, 비정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다 보면 우리 안의 무언가가 달라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안으로 짓눌릴수록 더 멀리까지 튀어 오르는 용수철처럼 감정의 방향이 뒤바뀌는 순간이.
언젠가 한번은 영경을 향한 수환의 사랑을 상상하며 이런 문장을 썼다. “물을 마시지만 물을 침범하지 않는 사랑을 알고 싶었다”(시 ‘측량’). ‘그래 맞아, 산다는 건 끔찍해. 그렇더라도…’라는 마음으로 일으킨 문장이다. 사랑의 모양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사랑은 태어나고 자란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잠시 발치가 환해지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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