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0일 대통령 후보 배우자 TV토론을 제안했다 단박에 거절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침 댓바람부터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국힘의 김문수 후보 부인과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후보 부인이 여성·아동·노인·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 철학은 물론 영부인 책임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진솔히 나눠주길 기대한다”고 했다가 30분도 안돼 민주당한테 “해괴하고 어처구니없는 제안”이란 반응만 들은 거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혜경 여사(왼쪽)와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 부인 설난영 여사. 뉴시스
괴랄(괴상+발랄)한 제안이긴 하지만 전혀 터무니없다고도 할 수 없다. “영부인은 대통령 곁에서 국민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서 있는 공인인데 우리 정치에서 오랫동안 검증 사각지대에 있었다”는 김용태의 말은 틀리지 않는다. 전 대통령 윤석열이 탄핵당한 것도 따지고 보면 부인 김건희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국힘은 사죄부터 했어야 옳다. 김건희의 국정 개입, 당무 개입 사실이 파다한데도 윤석열의 격노가 무서워 V0(제로)를 견제 못한 국힘의 무능과 무책임이 결국 패가망신으로 돌아온 것부터 무릎꿇고 빌어도 모자랄 판이다. 비판이 쏟아지자 김용태는 21일 “김건희의 과거 행위에 대한 국민의 우려를 헤아리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영부인 검증과 공적 책임 부여, 친인척 감시 감찰을 약속했지만 그 정도로는 턱도 없다. 핵심은 대통령 부인(길다. 줄여서 영부인으로 쓰겠다)의 국정 개입이기 때문이다.
● 국힘은 김건희 국정개입 사죄부터 했어야
국힘이 민주당에 앞서 ‘대통령 배우자 국정 개입 금지’ 공약을 내놓는다면, 진정성을 믿어주겠다. 김문수의 부인 설난영은 20일 채널A와의 인터뷰에서 육영수 여사를 닮고 싶다며 선을 넘지 않도록 제2부속실이 필요하다고 했다. 좋은 말이지만 역시 핵심은 아니다. 2021년 말 김건희도 허위 이력을 사과하며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했지만 뻥이었다.
김문수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의 부인 설난영 여사가 20일 서울시립 은평노인종합복지관을 찾아 배식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국민의힘 제공설난영은 거창한 수행팀 없이 조용조용 선거운동 한다고 했다. 민주당이 이재명의 부인 김혜경을 위한 배우자실에 실장을 셋씩이나 둔 것과 대비된다. 심지어 배우자실장 정을호 백승아는 현직 의원이고 또 한 명인 변호사 임선숙은 상임총괄선대위원장실 수행실장인 친명계 정진욱 의원의 배우자다.
공직자도 아닌 후보의 ‘아내’가 혈세로 세비 받는 국회의원을 둘이나 수행실장으로 거느린다는 사실이 참으로 괴이쩍다. 이재명은 배우자 토론 제안에 “정치는 대통령이 하는 거지 부인이 하는 게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그렇다면 왜 김혜경은 정치인인 의원들을 배우자실장으로 수행시키는지, 내 혈세가 아깝다.
● 배우자실장으로 금배지 거느린 김혜경, 조용할까
대통령 당선 전부터 이럴진대 김혜경이 영부인이 되면, 영부인실장은 대통령실장과 동급으로 격상될지 모를 일이다. 그럼 그 계급에, 그 월급 받고 조용히 있겠나. 무엇이든 일을 만들어 표나게 움직일 게 뻔하다. ‘영부인 국정 개입 금지’는 오히려 민주당에서 내놔야 할 공약이다. 더구나 김혜경은 과거 법카-관용차 사용(私用) 의혹에서 자유롭지 않은 형편 아닌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부인인 김혜경 여사가 16일 광주 북구 효령동 효령노인복지타운을 방문해 음식을 나누는 배식봉사를 하고 있다. 뉴스12022년 대선 한 달 전, 김혜경은 “공직자의 배우자로서 공과 사의 구분을 분명히 해야 했는데 제가 많이 부족했다”고 공개 사과한 바 있다. 공익제보자인 경기도청 7급 공무원 조명현에게 초밥, 소고기 배달 심부름을 마구 시키고, 5급 공무원 배모 씨를 비서처럼 부렸으며, 법카를 사적 유용했다는 보도가 쏟아졌을 때다. 그는 “배모 사무관은 오랜 인연이다보니 때로는 여러 도움을 받았다”고 했지만 지금 이순간, 오랜 인연이랄 수도 없는 현직 의원들 수행까지 받는 것이야말로 영부인 뺨치는 의전이다.
그럼에도 김용태가 ‘여성·아동·노인·장애인 정책’ 배우자 토론을 제안하고 민주당 거부를 비판한 것은 너무 나갔다. 영부인이 되면 대놓고 저출산고령화 정책에 개입하라는 것과 다름없어서다. 무슨 여성가족부 장관 청문회를 하는 것도 아니고, 윤석열-김건희 정권의 문제가 뭔지 아직도 모르는 듯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핵심은 김건희의 국정농단이었다. 영부인은 괜히 ‘정책’을 논해서도, 끼어들어서도 안 된단 말이다.
● ‘김건희 방지’ 공약과 법률 시급하다
후보 배우자 검증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2022년 1월 김건희의 ‘7시간 녹취록’ 방송 여부가 논란일 때 법원은 “후보 배우자의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대한 견해는 비판과 감시 대상”이라며 약간의 단서를 붙여 방송을 허가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지난해 9월 10일 ‘세계 자살 예방의 날’을 맞아 서울 마포대교에서 경찰들에게 생명의 전화에 대한 설명을 청취하고 있다. 이 사진이 공개된 직후 “영부인이 대통령 행세를 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동아일보DB하지만 후보한테 전과가 몇 개씩 있어도 유권자들은 눈 하나 깜짝 않는 요즘이다. 배우자에게 전과나 하자가 있은들 대선에 무슨 영향을 미치랴 싶다. 공개 발언이나 약속으로 ‘영부인 리스크’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선 전 윤석열은 특별감찰관 설치를 약속했으나 뭉개버렸고, 2023년 초 “배우자도 할 일이 적지 않더라. 처에게 드러나지 않게 겸손하게 잘하라고 했다”고 말했으나 이 역시 뻥이었다. 진실은 녹취록에 있었다. “내가 정권 잡으면 (거기는) 무사하지 못할 거야”란 발언이다(그래서 2022년 1월 20일 ‘대통령 부인이 잡을 권력은 없다’는 신문 칼럼을 썼다ㅠㅠ).
‘제2의 김건희 방지’ 공약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선 급한 대로 당 차원에서 “영부인 국정개입 절대 없다”고 공약부터 내놓고, 집권하면 미국처럼 아니 개혁신당이 지난해 10대 정책으로 내놓은 것처럼 ‘대통령 배우자의 법적 지위 및 지원에 대한 법률’을 만들어 공직자에 준하는 책임과 의무, 지원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 미국도 ‘정치적 영부인’은 좋은 소리 못 들어
대통령제의 원조인 미국에선 대통령 배우자도 대통령직(presidency)의 일부로 인정한다. 1978년 제정된 미국 연방법(USC) 제3편 제105조는 “대통령의 의무와 책임을 수행하는 데 대통령의 배우자가 대통령을 지원하는 경우 대통령에게 부여되는 지원 및 서비스가 배우자에게도 부여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공공연하게 국정까지 관여하는 건 아니다. 인도주의적 명분이 분명한 영부인 사업(pet project)을 주로 한다.
올해 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 빌 클린턴 (왼쪽) 전 미국 대통령과 부인 힐러리 클린턴. AP 뉴시스나중에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지내고 대선 후보로 나설 만큼 유능한 힐러리 클린턴도 남편이 대통령일 때는 의료개혁 태스크포스를 맡았다고 무지하게 욕을 먹었다. 미국도 선출되지 않은 ‘공동 대통령’은 원치 않는 것이다. 그래도 이 태스크포스 관련 소송이 걸렸던 1993년 ‘영부인은 정규직 연방 공무원 또는 직원과 기능적으로 동등한 존재’라는 판례가 나왔다. 그때부터 영부인에겐 고위 공직자에 준하는 규제와 의무, 윤리강령과 면책특권이 적용된다. 의상비와 식비를 포함한 백악관 생활비를 사비(私費)로 써야하는 건 물론이다.
프랑스에선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2017년 취임 직후 미국처럼 배우자 지위와 예산을 법제화하려다 엄청난 비판에 접고 말았다. 선출되지 않은 자에게 공적 지위를 부여할 순 없다는 이유에서다. 대통령의 사생활에 너그러운 이 나라에서도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부인이 대통령 카드로 400유로를 썼다고,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를 접견했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그만큼 선진국은 공사구분에 엄격하다.
● ‘대통령 놀이’할 배우자는 나가라, 정치판으로
2017년 8월 발표된 프랑스 ‘투명성 헌장’엔 대통령 배우자의 공적 역할로 ▲정상회의 및 국제회의에서 대통령과 동행 ▲국민과의 소통 ▲ 엘리제궁 행사 감독 ▲자선행사와 사회·문화행사 참석 지원 등을 명시했다. 정치 관여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2명의 비서관을 둘 뿐 별도 예산도 책정되지 않는다. 대통령실 예산에 포함된 배우자 관련 지출은 감사원의 감독을 받도록 했다.
이재명 후보의 부인 김혜경 여사의 법인카드 사적 유용 의혹을 제보한 경기도청 7급 공무원의 발언을 보도한 채널A 당시 뉴스. 채널A 화면 캡처우리나라는 대통령경호법에서 경호 대상으로 대통령과 그 가족만 규정했지, 대통령 배우자관련 법은 어디에도 없다. 대통령과 권력을 공동행사한다는 법은 더더구나 없다. 청탁금지법(김영란법)에 공직자의 배우자는 금품수수 금지 규정만 있지, 처벌 규정도 없다는 사실은 참 황당하다. 김건희의 디올백 꿀꺽에 대해서도 국민권익위원회는 작년 6월 “청탁금지법상 공직자 등의 배우자 제재 규정이 없기 때문에 종결을 결정했다”며 면죄부를 주었다.
파면 당한 대통령 윤석열은 재임 시 용산 대통령실 2층과 5층에 집무실을 만들어놓고 김건희와 공동으로 쓰는가 하면, 대통령 보고서도 2부 씩 만들어 바치라 했다. 취임 전부터 김건희의 공천 개입과 ‘김건희 라인’ 인사에 꼼짝 못했을 뿐 아니라 작년 11월 마지막 기자회견에선 “대통령 부인의 조언을 국정농단이라고 한다면 국어사전을 다시 써야 한다”는 황당궤변까지 남겼다. 김건희가 그렇게 대통령 노릇 하고 싶으면 “우리 남편 바보”에게 맡길 게 아니라 김건희 자신이 대선에 나왔어야 했다.
하긴 김건희 탓할 것도 없다. 미국의 G. D. 웨킨은 2000년 ‘퍼스트레이디의 역할 한계’ 논문에서 정치에 적극 개입하는 영부인을 ‘요부형’이라고 했다. 사랑에 겨워 요부의 국정농단을 조언으로 받아들였던 윤석열이 문제였던 거다.
● 공사 구분 못한 이재명 부부, 윤석열 전철 밟을라
이재명은 김혜경의 공무원 사적 부림과 법카 사용에 대해 “남편 업무 지원하는 잘 아는 비서에게 사적으로 음식물 심부름 시킨 게 죄라면 죄겠지만…”이라고 썼다. 올 초 이재명의 인생과 정치철학을 담아 낸 책 ‘결국 국민이 합니다’에서다. 웃긴다. ‘죄라면 죄’가 아니라 그게 바로 보통 사람은 꿈도 못 꾸는 업무상 배임죄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배우자 김혜경 씨의 ‘법인카드 유용 의혹’과 관련 공직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돼 항소심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 판결을 받은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전 경기도청 사무관(별정직) 배모씨가 지난해 2월 14일 오후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을 마친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배 씨는 상고하지 않았고, 형이 그대로 확정됐다. 뉴스1최근 김혜경이 2심에서 150만원 벌금 선고 받은 10만4000원 법카 결제는 공직선거법 공소시효 때문에 서둘러 재판받은 것 뿐이다. 경기지사 시절 샌드위치, 과일, 소고기, 관용차 사적 이용 등 1억653만 원의 업무상 배임 혐의에 대해선 이재명이 불구속기소 돼 4월 8일 첫 공판기일이 열렸다. 김혜경은 가담 정도를 감안해 기소 유예됐다(언제 재판이 또 열릴지는 영영 모를 것 같다). 그런데도 이재명은 “얼마나 억울하고 힘들까”라며 책 속에서 외쳤다. “혜경아, 사랑한다.”
다수 국민은 더 억울하고 억장 무너진다. 권력자들이 그놈의 사랑에 눈멀어 사인의 국정농단도 당연하게 봐주는 바람에 정권이 무너지고, 나라가 흔들리는 판국이다. 선출되지도, 임명되지도 않은 대통령 배우자들의 국정 개입을 더는 용납 못한다. 국힘은 안 해도 좋다. 이재명의 민주당이 윤석열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하루빨리 ‘김건희 방지’ 공약과 법률을 내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