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발트 3국은 소련의 불법 점령에 맞서 독립을 요구하며 ‘인간 띠잇기’ 운동을 펼쳤다. 위키피디아
사람도, 국가도 경로의존성이 있다. 새 남친을 사귀는 여자는 가만 보면 헤어진 전 남친과 꼭 닮은 남자를 만나고 있다(‘나쁜 남자’일 경우가 적지 않다). 독재를 겪은 나라도 비슷하다. 독재적 성향이 있는 대통령을 다시 뽑는다.
학교 때 공부습관도 그런 것 같다. 시험 망치고 교과서 들춰보며 가슴 쳤던 나는 여행도 갔다 와서 뭘 찾아보곤 한다. 패키지여행으로 발트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을 다녀온 뒤 동화처럼 예쁜 구 시가(市街)와 함께 성냥갑 같은 소련식 건물이 남아있는 이 나라들이 궁금해져 자료를 뒤져봤다.
1919년 3·1운동이 국제사회에 알려지자 제일 먼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한 나라가 유라시아대륙 저쪽 끝의 에스토니아였다. 이 사실을 ‘발틱의 윌슨적 순간’이란 논문의 첫 번째 각주를 보고 알았다(김학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우리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영향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지만 정작 독립한 나라는 발트3국 등 1차 세계대전 패전국가의 점령국들이었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내려다 본 성 캐서린 골목. 동아일보 DB● 윌슨의 순간, 발트3국은 독립했다
김학재의 논문은 100여 년 전 발트3국의 독립과 민주주의 경험이 경로의존성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물론 독립은 독일과 러시아제국의 패망, 그리고 ‘윌슨의 순간’이 있어 가능했다. 18세기 러시아제국에 편입된 이들 나라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가 붕괴하자 잇달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적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의 역사적 경험이 1991년 소련이 망한 뒤 자유롭고 민주적인 발트3국 부활로 계승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1차 독립도, 2차 독립도 쉽지 않았다. 레닌 혁명 뒤 발트3국도 지역 볼셰비키의 통제 속에 들어갔다. 1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자 소련이 점령군으로 몰려왔고 발트3국은 치열한 독립전쟁에 나섰다.
공산주의 확산을 경계한 영국 프랑스 등의 지원이 있었지만 국내는 친러파, 친독파에 독립파-연방파까지 어지럽게 분열됐다. 마침내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공산세력을 몰아냈고 1920년대 국가 건설의 주도세력이 됐다.
● DNA에 새겨진 100년 전 독립 경험
그 무렵 우리에게도 민주공화정부를 세운 역사가 있다. 영토는 잃었으나 1919년 상해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헌장 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명시했다. 당시 독립운동을 했던 지도자들이 1945년 일본제국 패망 뒤 국가 건설의 지도자가 됐다. 역사적 경험은 국민의 DNA로 새겨진다.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동아일보 DB 국부(國父)를 자처했던 발트 3국 지도자들이 1930년대 대공황과 독일 히틀러 집권이 이어지자 독재자로 변모했다는 점도 남의 일 같지 않다. 에스토니아의 콘스탄틴 페츠는 선거 패배가 예상되자 1934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권위주의적 통치를 시작했다. 페츠의 본을 따른 라트비아의 카를리스 울마니스는 정당과 선거 없이 ‘결사체’로 통치하면서 그것이 국민의 소리라고 주장했다. 리투아니아의 안타나스 스메토나는 1927년 국회를 해산하고 이듬해 간선 대통령제로 개헌해선 2차 대전 끝까지 통치했다.
옛 러시아제국 즉 소련에 합병돼 더 센 독재를 겪은 이들이 민주주의를 되찾은 것은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진 다음이었다. 궁금했다. 민주주의 경험과 독재의 경험, 어느쪽 경로가 더 의존적이고 중독적일까.
● 민주주의 경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해본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련의 마수에서 벗어난 발트 3국이 다른 동유럽 국가보다 빠르게, 그리고 순조롭게 민주주의로 갈 수 있던 데는 경로의존성 영향이 적지 않았다.
논문은 “(1920년대) 가장 급진적 토지개혁을 이룬 에스토니아 헌법이 가장 의회주의적이었고, 이후 (1930년대) 등장한 권위주의도 가장 덜 무자비한 유형”이라고 했다. 토지개혁이 가장 부족했던 리투아니아에선 대통령제가 강한 헌법이 도입됐다. 기독교 보수주의 정당이 집권했으며 이후에도 강력한 대통령 독재가 실시됐다는 것이다.
에스토니아 의회 ‘리기코구’가 있는 톰페아 성. 위키피디아 1990년대 소련 붕괴 뒤 다시 독립국가를 건설하면서도 발트3국은 유사한 경로를 밟았다. 소련에 병합되기 전의 정치시스템과 제도를 되살리려 했기 때문이다. 92년 9월 정초선거가 실시된 에스토니아에선 32세의 젊은 총리 마르트 라르가 등장해 급격한 자유시장제를 도입했다. 라트비아에서도 중도우파의 ‘라트비아의 길’이 의회주의적 민주주의의 길을 걸었다. 준대통령제가 도입된 리투아니아에선 탈사회주의 국가로선 처음으로 구 공산주의세력이 집권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2018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탈사회주의 체제전환과 발트3국의 길’).
● ‘유상몰수 유상분배’ 토지개혁이 시장경제로
여기서 또 궁금한 것이 어떤 토지개혁을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느냐다. 1920년대 발트3국은 과거 왕족 교회 귀족들의 소유지를 몰수해 분배했는데 김학재의 논문은 에스토니아가 토지 94%를 몰수해 69%가 농민소유가 됐다고 했다. 라트비아는 84%를 몰수해 54%가 농민소유로, 리투아니아는 77%를 몰수해 17%가 농민소유가 됐다. “발트 3국은 다른 동유럽의 어떤 신생국보다 급진적이고 균등하고 전면적이었다”지만 해방 후 대한민국처럼 유상몰수 유상분배인지, 북조선처럼 무상몰수 무상분배인지 그게 알고 싶었다.
유럽 동부와 북부 사이에 있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는 ‘발트 3국’으로 불린다. 영어권에서는 ‘Baltic states’로 불린다. 미국 의회도서관 리투아니아의 역사가 게디미나스 바스켈라의 논문에서 찾았다. 유상몰수 유상분배다. 1919~1940년 동중유럽 토지개혁을 연구한 바스켈라에 따르면, 에스토니아에선 지주에 대한 보상은 늦어졌지만 1926년 ‘실제 가격(real price)’으로 받도록 했다. 리투아니아에서도 무상분배 주장이 있었지만 결국 원래 소유자는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선 미군정기와 정부 수립 후 두 차례 토지개혁으로 61만여㏊를 분배했다. 1945년 광복 당시 조사된 소작지 140만여㏊의 42.4% 토지다. 나머지는 지주들이 직접 농사를 짓거나 임의로 처분하거나 은닉함으로써 개혁 대상에서 제외된 것으로 본다(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경험이 발트3국의 체제전환 과정에서, 우리나라에선 해방 뒤에 시장경제로 이어질 수 있었을 터다.
● 120년 전 러일전쟁, 발트3국부터 한국까지
1905년 9월 5일은 러일전쟁을 종결시킨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된 날이다. “어쩌면 1920년대 동유럽의 독립과 동아시아의 식민지배는 러일전쟁(1904~1905년)이 낳은 서로 다른 역사적 결과라 할 수 있다”고 김학재는 논문에 썼다.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제국에선 공산혁명이 터져 발트3국도 독립할 수 있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지 두 달 만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조약을 맺었다.
1905년 포츠머스조약을 맺는 러시아와 일본 대표들. 동아일보 DB 120년이 지난 2025년 9월 3일 톈안먼(天安門) 광장.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이 열린 그 자리에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이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을 좌우에 거느리고 망루에 섰다. 중국은 130년 전인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과거가 있다. 패전국 중러가 다시 패권국가를 꿈꾸며 북한과 함께 반(反)민주주의-전체주의 ‘운명공동체’를 과시하고 있다.
한반도만 지정학적 요충지가 아니었다. 발트3국도 지정학적으로 유럽의 전략적 요충지라고 자소서를 쓴다. 그래서 주변 군사대국으로부터 잦은 침략을 받아왔다는 거다.
그런 경로의존성은 못난 지도자의 가스라이팅으로 돌리고 싶다. 1920년 전후 발트에서 대한민국 임정까지, 민주공화정부를 세우고 지켰던 역사적 경험을 86집권세력도 기억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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