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1999년)에선 망자들이 이승을 떠나기 전 자신의 가장 소중한 추억을 골라내 영상에 담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시대 박최인(朴㝡仁·1762∼1835)도 마치 죽고 난 다음에 쓴 것처럼 지난 삶의 기억들을 자만시(自挽詩·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에 담아 놓았다.
한미한 소북(小北·북인의 한 분파) 집안 출신의 시인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오직 미간행 필사 시집에만 실린 176구에 이르는 장편 시에는 남들이 알 수 없는 시인의 삶이 켜켜이 채워져 있다.(‘五大家詩’ 수록 ‘睡窩詩稿’)
영화 속 70대의 와타나베가 지난 삶의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을 찾기 위해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의 삶을 기록한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던 것처럼, 시인도 자신의 지난 세월을 마치 연보(年譜)라도 기록하듯 찬찬히 되돌아봤다. 임오년에 태어난 시인의 삶은 가난, 병, 과거 낙방과 벼슬길 좌절, 그리고 상처(喪妻)와 산수 유람 등의 키워드로 이어진다.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상황에서 태어나 천연두와 홍역까지 심하게 앓았지만 부모의 헌신적 보살핌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일화가 인상적이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에서 와타나베는 자신의 삶을 기록한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며 지난 인생의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을 찾아본다. 안다미로 제공감독은 자료 조사를 위해 인터뷰한 사람들의 실제 추억들이 영화 내용이 됐다고 고백한 바 있다(‘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시인도 죽음을 상상하는 허구적 글쓰기 속에 실제 삶을 가감 없이 담아 놓았다. 영화에서 삶의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한순간만을 선택해서 영원한 기억으로 남겼다면, 시에서는 삶 전체를 시간 순서대로 펼쳐 놓았다.
늘상 보는 달빛이지만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여서 더 끌린다는 영화 속 대사처럼, 반복되는 생로병사의 인생일지라도 포착하는 방식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세속적 기준으로 볼 때 시인의 삶에서 행복과 성취를 찾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죽음이란 윤곽을 통해 선명해진 삶의 기억들은 감사함으로 남는다.
영화에서 망자들은 영상에 담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추억을 간직한 채 저승으로 떠난다. 시에선 자신의 고단하고 힘겨운 삶 속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곤 붉은 명정(銘旌)이 걸린 무덤의 이미지로 마무리했다. 영화와 한시 모두 인생의 경이로움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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