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이 배경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레오파드’에서 여주인공 콘체타(베네데타 포르카롤리)는 남주인공 탄크레디(사울 난니)에게 화끈하게 사랑을 고백한다. 원래 둘은 이른바 ‘썸’ 관계였지만, 탄크레디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에 콘체타는 당대 여성으로선 쉽지 않은 결단을 내린 것. 원작 소설 ‘표범’(민음사)에선 철저히 수동적이던 그가 드라마에선 왜 이렇게 그려진 걸까.
국내에선 다소 낯선 이탈리아 드라마인 ‘레오파드’는 이탈리아 통일운동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를 배경으로 귀족 사회의 몰락과 사랑을 다룬 시대극. 5일 공개된 뒤 넷플릭스 비영어권 TV쇼 부문에서 4위를 기록하며 주목받고 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소설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1896~1957)가 쓴 장편 ‘표범’이 원작이다. 1958년 출간 이후 ‘이탈리아 국민소설’로 불리며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원작에서 콘체타는 매우 수동적인 여성으로 묘사된다. 아버지 권위 아래 침묵하며, 탄크레디에 대한 연정은 끝내 표현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콘체타가 새로운 사회의 미끄러운 계단을 오르려는 야심 많고 똑똑한 남편을 내조할 수 있을까? 수줍음 많고 신중하고 내성적인 콘체타가?”라며 회의적인 시선을 보낼 정도다.
드라마 ‘레오파드’. 넷플릭스 제공 “언제나 순종하고 아버지가 아무리 불쾌하게 의사 표시를 해도 온하하게 따를 줄 알았다. 그녀는 지금처럼 변함없이 아름다운 기숙학교 여학생으로 남아서 남편 앞길에 걸림돌이나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반면 드라마에서 콘체타는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숨기지 않는다. 탄크레디가 혁명군에 합류하려하자 “모든 걸 희생해서 친구(혁명군)를 돕겠다고? 우리(귀족)가 진다고 누가 그래?”라며 맞선다. 미술과 천문학에 관심 있는 학구적 인물로도 그려진다.
이런 극적인 변화는 현대 여성 시청자를 겨냥한 각색으로 읽힌다. 박여영 민음사 부장은 “소설에서 콘체타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품은 채 늙어 가는 슬픈 인물로 그려지지만, 드라마에서는 전혀 다른 캐릭터로 주연에 가까운 비중을 지닌다”며 “현대적인 여성의 역할을 반영하고려는 제작진의 의지가 느껴진다”고 했다.
박 부장은 “드라마 속 살리나는 조카 탄크레디에게 가문의 미래를 ‘투자’한다면 콘체타에겐 가문의 정신적 상속자의 역할을 맡긴다”며 “콘체타는 가부장적인 당대 사회의 희생양이지만, 그럼에도 ‘표범’의 정신적 계승자로 남게 된다”고 했다.
드라마 ‘레오파드’. 넷플릭스 제공 ● ‘브리저튼’의 이탈리아 버전?
콘체타를 떠난 탄크레디가 선택한 인물은 안젤리카(데바 카셀)다. 귀족 가문 출신인 콘체타와 달리, 안젤리카는 신흥 부르주아 계층의 딸. 그는 미모와 야망을 무기로 탄크레디를 사로잡는다. 탄크레디가 안젤리카를 처음 본 장면을 원작 소설은 이렇게 묘사할 정도다.
“크림색과 흡사한 피부에서는 신선한 크림 냄새가 나는 듯했다. 어린아이 같은 입술에서는 딸기향을 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새까맣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물결쳤고, 새벽 별처럼 반짝이는 초록 눈은 석상의 눈처럼 움직임이 없었는데 약간 잔인해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천천히 걸었고 움직일 때마다 폭이 넓은 흰 드레스가 춤을 추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확신하는 여자가 그렇듯이 침착했고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한 분위기를 풍겼다. 사람들은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그 집에 들어온 순간 긴장해서 기절할 뻔했다는 사실은 몇 달 뒤에야 알게 됐다.”
드라마 ‘레오파드’.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는 이런 ‘관능미’를 한층 극대화한다. 무도회 장면에선 붉은 드레스를 입고 등장해 모든 인물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안젤리카를 연기한 카셀은 배우 모니카 벨루치와 뱅상 카셀의 딸. 이탈리아에서 주목받는 신예배우로, 젊은 층을 겨냥한 캐스팅으로 보인다.
화려한 무도회와 관능적 사랑을 통해 계급과 욕망, 사랑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낯익다. 넷플릭스에서 가장 성공한 콘텐츠 중 하나인 드라마 ‘브리저튼’을 연상시킨다. 브리저튼은 영국 리젠시 시대(1811∼1820)를 배경으로 사치와 타락,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자극적인 영상으로 담아냈다. 드라마 ‘레오파드’의 각색을 맡은 영국 작가 리처드 월로우도 영 BBC방송 인터뷰에서 “‘더 크라운’이나 ‘브리저튼’처럼 이 작품도 시각적 화려함이 강점”이라고 설명했다.
드라마 ‘레오파드’를 보고 있다 보면, 그 뒤에 놓인 원작 소설에도 손을 뻗어보고 싶어진다.
이 소설의 작가는 이탈리아 남단 시칠리아섬에서 유서 깊은 귀족 가문,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집안의 마지막 후예로 태어났다. 한때 법학을 공부했으며,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헝가리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탈출해 이탈리아까지 걸어 돌아온 그는 평생을 외국 문학을 읽고 번역하며 조용히 살아갔다.
그가 생의 끝자락에서 완성한 유일한 장편 소설은 당시 여러 출판사로부터 외면받았다. 그러나 그가 숨을 거둔 지 1년 뒤에 세상에 나왔고, 이듬해 이탈리아 최고 문학상인 스트레가상을 거머쥐며 이탈리아 문단의 풍경을 뒤흔들었다.
원작 소설 작가. 민음사 제공 소설은 단지 한 귀족 가문의 쇠락사만 담은 작품이 아니다. 작품은 빛과 그림자가 얽히듯 아름다움과 쇠락, 삶과 죽음, 전통과 변화, 위계와 갈등이 교차하는 풍경을 정교하게 그려낸다. “모든 게 그대로 유지되길 원하면,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한다.” 이 역설적인 선언은 시대의 변곡점에서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일깨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고전 소설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의 드라마는 그저 자극적이고 호화로운 볼거리만은 아니다”며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감각적인 연출 너머로 격변의 시대에 지배계층이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날카롭게 들여다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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