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8과 1/2’(1963년)에서 제목은 연출한 작품의 연번을 의미하는 데 불과하지만, 작품에는 감독 자신의 이야기와 고민이 담겨 있다. 청말 공자진(龔自珍·1792∼1841)의 ‘기해잡시(己亥雜詩)’도 제목은 기해년(1839년)에 자유롭게 쓴 시라는 의미일 뿐이지만, 시에는 자신의 일생이 담겨 있다.
시인은 벼슬을 사직한 뒤 유람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315수에 이르는 연작시를 남겼다. 시로 쓴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시에는 개혁사상가로서 그가 가진 당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식과 자신의 학문 이력에 대한 회고는 물론이고 애정 문제 같은 사생활에 대한 솔직한 고백까지 담겨 있다. 위 시에선 세상에 물들어 변질된 현재의 자신과 대비되는 소년 시절을 추억했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 자신의 타고난 성품이 슬픔과 즐거움에 유달리 예민했다고 자술한 바 있다(‘寒月吟’ 네 번째 수).
영화 ‘시민 케인’에서 케인이 늘 그리워했던 것은 어린 시절 타던 썰매 ‘로즈버드’란 말로 집약되는 순수했던 동심의 추억이다. RKO 라디오 픽처스 제공‘기해잡시’가 시인의 지난 삶에 대한 총결산이라면, 오슨 웰스 감독의 ‘시민 케인’(1941년)은 찰스 포스터 케인의 일생 톺아보기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선 언론 재벌이자 정치인인 케인이 남긴 수수께끼 같은 유언 ‘로즈버드’가 케인의 일생을 관통한다. ‘로즈버드’는 케인이 어릴 적 타던 썰매인데 부모와 헤어져 동부에 있는 기숙 학교로 보내질 때 빼앗긴 추억의 물건이기도 하다.
시인이 말한 동심처럼 로즈버드 역시 케인이 한평생 되찾으려고 노력하던 어린 시절 순수함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케인은 젊은 날의 순수한 열정을 잃고 점점 타락하여 몰락하고 만다. 케인이 남긴 유언의 의미를 탐문하다 실패한 기자는 누군가의 인생을 한마디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로즈버드는 케인이 얻을 수 없었거나 잃어버린 어떤 걸 거라고 추정한다.
삶을 시적 표현 하나로 규정할 순 없지만, 시인은 스스로를 ‘떨어진 꽃(落紅)’, ‘떨어진 꽃의 혼(落花魂)’에 빗대곤 했다(제5수, 제247수). ‘서교낙화가(西郊落花歌)’에선 자신만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재능 있는 지식인들의 처지까지 떨어진 꽃에 빗대 탄식하기도 했다.
시인은 급변하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외롭게 개혁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시인이 뿌려놓은 변화의 씨앗은 그가 죽고 난 이후에나 꽃을 피우게 된다. 시인은 세속에 물들어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어릴 적 순수한 동심의 나날을 떠올렸다. 그 시절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지난 추억이 더욱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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