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혹한 현실 보여준 미러 정상회담]
우크라 궁지로 몬 미러 정상회담
트럼프 “휴전보다 평화협정 직행”… ‘돈바스 병합’ 푸틴 주장 사실상 수용
유가 감안 러 석유 등 제재 접어… “전쟁 끝나면 러와 대규모 무역 원해”
‘종전 집착 일방적 친러 행보’ 지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5일(현지 시간) 미 알래스카주 앵커리지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장에 들어서고 있다. 행사장 벽면엔 ‘평화 추구(Pursuing Peace)’란 문구가 적혀 있지만, 미-러가 사실상 일방적으로 우크라이나 영토에 대한 조정을 논의했단 지적이 나왔다. 앵커리지=신화 뉴시스
“젤렌스키가 ‘돈바스’(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와 루한스크주를 합한 지역)를 포기하면 러시아와 신속한 평화 협상이 가능할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5일(현지 시간) 미 알래스카주 앵커리지에서 열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회담 직후 유럽 주요국 정상들에게 이같이 말했다고 뉴욕타임스(NYT) 등이 16일 전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최대 격전지인 돈바스를 러시아 영토로 편입시키겠다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을 사실상 수용한 것이나 다름없는 발언이란 분석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둘러싼 협상이 주권국을 선제 침공한 ‘강대국’ 러시아의 논리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유럽 주요국은 “돈바스를 포기할 수 없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일각에선 노벨 평화상 수상과 국제유가 안정화 등에 관심이 많은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을 서둘러 종식시키는 데만 집착해 친(親)러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돈바스 병합” 사실상 수용… 궁지 몰린 우크라
두 정상은 회담장 이동 과정에서 미 대통령 전용차 ‘캐딜락원(비스트)’에 동승했다. 사진 출처 X두 정상은 이날 회담에서 실질적인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도 “건설적인 대화를 나눴다”고만 했을 뿐 세부 합의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사실상의 입장 선회를 시사했다. 그는 트루스소셜에 “끔찍한 전쟁을 끝내는 최선의 방법은 단순한 휴전 협정이 아니라 평화 협정으로 직행하는 것”이라며 러시아의 돈바스 합병 주장을 두둔하는 취지의 글을 썼다. 회담 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모두 일부 영토를 주고받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트럼프 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유럽 정상들에게 “러시아로부터 단순 휴전을 이끌어 내려는 시도를 중단하라”는 요구를 했다고 전했다.
돈바스 면적은 한국의 절반 수준인 약 5만3200km². 약 665만 명이 거주하며 39% 정도가 러시아계다. 푸틴 대통령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때도 이곳의 “러시아계 주민 보호”를 주요 명분으로 내세웠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러시아는 현재 루한스크주의 대부분, 도네츠크주 약 70%를 장악했다. 돈바스 전체의 약 88%인 약 4만6570km²를 점령하고 있고, 나머지 12%(약 6630km²)까지 우크라이나에 포기하라는 요구를 한 것이다.
다만, 러시아는 최근 미국에 우크라이나가 장악 중인 남동부 수미 일대의 약 440km²를 포기할 수 있다는 뜻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약 5만3200km²의 영토를 포기해야 하는 우크라이나와 비교하면 매우 미미한 수준이다. 특히 수미 일대는 낙후된 지역이지만 석탄 등이 풍부한 돈바스는 광공업, 제조업, 교통 중심지이다.
● 러시아, 관세 압박도 피해
러시아 관세 압박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도 180도 바뀌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전 러시아산 원유를 수입하는 중국 등에 “100%의 2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회담 뒤 “중국에 대한 관세 인상은 필요 없어졌다. 지금은 러시아 제재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을 바꿨다. 또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와 대규모 무역을 원한다”며 경제적 이익을 강조했다.
일각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국제 유가 등을 의식해 러시아 제재 카드를 접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러시아 제재 가능성이 낮아지면서 15일 런던 ICE선물거래소의 북해산 브렌트유는 전날보다 0.99달러(1.48%) 하락한 배럴당 65.85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이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이 18일 예정된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러시아의 영토 포기 요구를 수용하라”고 압박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다만 미-러 정상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안전보장 제공 방안에는 일정 부분 공감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 우크라이나에 서방 측 군대가 주둔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는 점을 언급했고, 푸틴 대통령은 이를 수용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 정상들과의 통화에서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하지 않더라도 러시아의 재침공 시 서방 국가들이 공동 대응하는 나토 조약 5조와 유사한 안전보장 체계를 논의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안전보장을 꺼리던 기존 태도와 달라진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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