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문호이자 언론인 에밀 졸라는 1898년 ‘여명’이란 뜻의 일간 신문 ‘로로르’ 1면에 프랑스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을 글을 기고했다. 펠릭스 포르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제목은 ‘나는 고발한다’. 다들 쉬쉬하던 ‘드레퓌스 간첩 사건’이 조작됐고, 드레퓌스는 무죄이며, 조작에 가담한 이들을 고발하니, 나를 잡아가서 신문해도 좋다는 내용이었다. 졸라는 이 글로 군법회의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이 사건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스캔들이 됐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1859∼1935) 육군 대위가 군사 기밀을 독일에 팔아 넘긴 혐의로 체포되면서 시작됐다. 독불전쟁에서 패배한 후 희생양을 찾던 군부가 마침 전쟁에서 빼앗긴 독일 접경 지역 알자스 출신의 유대인을 반유대주의 분위기에 편승해 증거도 없이 스파이로 몰고 간 것. 드레퓌스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악마의 섬’에 유배됐다. ‘나는 고발한다’는 이후 진범이 잡혔는데도 군부가 진실 은폐를 위해 진범을 찾아낸 조르주 피카르 중령을 좌천시키고 진범을 풀어주자 게재됐다.
▷거대한 국가 권력에 맞서 개인의 무고함을 주장하기란 쉽지 않은 일. 더욱이 드레퓌스 사건 당시 프랑스는 패전 후 민족주의와 유대인 차별 정서로 들끓었다. 프랑스인의 절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였는데 로마 가톨릭교회도 드레퓌스 재심에 반대했다. 드레퓌스 무죄를 주장했던 이는 소수의 지성인과 양심 있는 군인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의 진범을 찾아낸 피카르 중령은 “대체 무엇 때문에 그 유대인을 위해 애를 쓰느냐”는 상사의 질책에 답했다. “드레퓌스는 죄가 없으니까요.”
▷결국 세계 언론까지 주목하면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게 됐다. 드레퓌스는 1906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복권돼 중령으로 제대했고,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최고 영예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군부를 개혁하고, 공화정을 안착시켰으며, 프랑스식 정교분리인 ‘라이시테’ 원칙을 수립했다. 사족을 달면 군부 편에서 드레퓌스 재심을 거부했던 대통령은 1899년 엘리제궁에서 유부녀와 밀애 중 숨졌다. 프랑스에선 드레퓌스 얘기가 나올 때마다 졸라와 포르 대통령 이름이 거론된다.
▷프랑스 하원이 90년 전 작고한 드레퓌스 중령을 준장 계급으로 추서하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하원은 “반유대주의는 과거의 일이 아니다. 공화국은 모든 종류의 차별에 맞서 경계심을 유지하고 단호함을 보여야 한다”고 법안 제안 이유를 밝혔다. 세계 곳곳에서 차별과 증오가 마녀사냥에 나서고 불의한 권력이 개인의 인권을 유린할 때마다 131년 전 드레퓌스 사건과 진실의 편에 섰던 ‘나는 고발한다’가 행동하는 지식인의 다짐으로 소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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