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의 달인’을 자임해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두고두고 ‘자랑’할 사진 한 장이 공개됐다. 일본 측 관세 협상단과 22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마주 앉은 트럼프의 책상 위에는 ‘$400B(빌리언)’이란 액수가 인쇄된 패널이 놓였다. 그런데 숫자 4는 펜으로 지워져 있고, 그 위에 ‘500’이란 손 글씨가 적혀 있었다. 협상 도중에 트럼프의 즉흥적 요구로 일본의 대미 투자액이 자그마치 5000억 달러로 1000억 달러(약 137조 원)나 늘어났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트럼프가 몇 시간 뒤 최종적으로 공개한 일본의 대미 투자펀드 규모는 5500억 달러(약 758조 원)로 그보다도 더 불어났다. 패널에는 ‘이익 공유 50%’란 문구도 있었다. 그런데 트럼프는 “(일본 투자에서 나오는) 이익의 90%는 미국이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당초 미국과 일본이 투자 이익을 ‘5 대 5’로 나누기로 했는데, 마지막에 분배 비율이 ‘미국 9 대 일본 1’로 바뀐 것이다.
▷대미 투자펀드 아이디어를 내고, 직접 ‘패널’도 만들었다는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5500억 달러가 일본의 자본, 대출, 대출보증을 합한 액수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이 ‘미국에서 항생제를 만들자’고 하면 일본이 자금을 댄다. 이익의 90%는 미국 납세자가 갖고, 10%는 일본이 가질 것”이라고 했다.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해 일본 돈을 트럼프 마음대로 쓰겠다는 거다.
▷개인 간에 이런 계약을 맺는다면 ‘강압에 의한 부당 거래’란 말이 나오겠지만 일본 정부는 오히려 자기위안으로 삼는 분위기다. 그 대신 25%로 예고됐던 상호관세, 자동차·부품 품목관세를 15%로 낮췄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국이 한국에도 똑같은 요구를 한다는 점이다. 블룸버그통신은 “러트닉 장관이 한국에 4000억 달러 투자펀드 조성을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요구액은 작년 한국 정부 예산의 80%가 넘는다. 경제 규모가 일본의 절반이 안 되는데, 투자액은 별 차이가 없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따로 믿는 구석도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올해 5월 인공지능(AI) 투자를 위해 미국 정부에 제안한 3000억 달러짜리 ‘미일 공동 국부펀드’로 투자액의 절반 이상을 갈음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국가 간 약속이 대체로 그렇듯 ‘트럼프 임기만 넘기자’는 속셈도 있을 것이다.
▷최종 담판을 앞둔 한국으로선 트럼프의 변덕에 대놓고 화를 내기도 어렵다. 일본과 최소 대등한 조건을 확보하지 못하면 대미 수출에 치명적 타격을 받게 돼서다. 30년 넘게 세계 최대 순(純) 채권국 자리를 지킨 일본과 투자 규모로 경쟁하기도 쉽지 않다. 한국 경제의 미래가 걸린 관세 협상이 점점 더 난감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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