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2022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로 진격하기 직전 먼저 동부 돈바스를 공격했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곳이다. 우크라이나가 이 지역의 러시아인들을 탄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 이면엔 돈바스가 키이우 등 주요 도시로 연결되는 철도 등 교통의 허브, 즉 전략적 요충지라는 사실이 있었다. 이곳을 러시아가 완전히 점령하면 언제라도 수도로 쳐들어갈 수 있는 진격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5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알래스카 회담에서 우크라이나를 향해 ‘돈바스를 완전히 포기하라. 그러면 현재 전선에서 공격을 멈추겠다’고 제안했다. 우크라이나로선 쉽게 응할 수 없는 사안이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침략당한 나라보다 침략자 푸틴의 ‘돈바스 요구’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유럽 정상들에게 전하는 ‘거간꾼’ 역할을 자처했다. 대선 전부터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공언해 온 트럼프는 전쟁을 빨리 끝내 ‘평화 중재자’ 이미지를 굳히려 하고 있다.
▷트럼프는 돈바스를 넘겨받는 대가로 푸틴에게 ‘우크라이나 안전 보장’이라는 거래 조건을 제시했다. 전쟁 전 젤렌스키는 안전 보장을 위해 나토 가입을 추진했고, 푸틴은 이를 러시아에 대한 안보 위협이라고 비난하며 침공의 또 다른 명분으로 삼았었다. 트럼프는 푸틴과 회담 뒤 유럽 정상들에게 ‘유럽의 안보유지군이 우크라이나에 주둔하면 미국이 군사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푸틴이 결사 반대하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문제는 트럼프가 제시한 안전 보장안으로 우크라이나가 안심할 수 있느냐다. 미국은 한 회원국이 공격받으면 나토가 공동 대응하는 ‘나토 조약 5조’와 비슷한 집단방위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데 푸틴도 동의했다고 했다. 하지만 푸틴은 그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이미 안보 보장 약속에 뒤통수를 맞은 적이 있다. 1994년 핵무기를 모두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 등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는 ‘부다페스트 각서’를 체결했지만 러시아의 침공을 막지 못했다.
▷19일 새벽(한국 시간) 백악관에서 트럼프와 회동하는 젤렌스키는 힘겨운 선택과 마주하게 된다. 트럼프는 ‘영토를 포기하고 안전 보장 약속을 받으라’고 종용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회담 전 공언했던 대러시아 제재에 대해서도 어떤 결과가 나오든 실행할 생각이 없음을 내비쳤다. 젤렌스키가 트럼프-푸틴의 조건을 수용한다면 트럼프에겐 노벨 평화상을 노릴 새로운 기회가 된다. 불법 침공의 가해자는 웃고, 거간꾼은 잇속을 챙기며, 피해자는 울며 겨자 먹기로 스스로 안보를 지키지 못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냉혹한 장면이 펼쳐질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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