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은 지난해 12월 건진법사 전성배 씨 자택에서 5만 원권 3300장(1억6500만 원)을 압수했다. 그때 검찰이 돈보다 더 주목한 것은 지폐를 묶어놓은 띠지였다. 띠지에는 일련번호와 출처가 기록돼 있는데, 돈의 출처를 밝혀내고 전 씨가 친분을 앞세우던 김건희 여사의 이권 개입 의혹을 밝혀낼 중요 단서였다. 이 가운데 5000만 원은 ‘한국은행’이 적힌 비닐로 포장된 관봉권(官封券)이었다. 그러나 돈을 묶는 띠지들이 검찰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일반인에게 생소한 관봉권은 한국조폐공사가 한국은행에 납품한 그대로의 돈다발이다. 관봉 띠지에는 검수 날짜, 담당자 코드, 사용 장비까지 표시돼 있다. 압수한 띠지에는 ‘2022년 5월 13일’이라는 날짜가 찍혀 있었는데, 윤석열 전 대통령 취임 사흘 뒤다. 과거 대통령실 특수활동비 사건에서 관봉이 종종 등장했기에 “대통령실 특수활동비 아니냐”는 의문이 나왔다. 당시 전 씨가 그 큰 액수를 놓고도 “누구에게서 받은 돈인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하던 때였다.
▷사라진 것은 띠지만이 아니다. 관봉권을 비닐로 포장한 뒤 붙이는 스티커도 함께 없어졌다. 그나마 스티커는 사진 촬영을 해 뒀는데, 띠지는 그마저도 없었다고 한다. 증거품인 돈다발은 현재 고무줄로만 묶여 있다. 서울남부지검은 “경력이 짧은 직원이 현금만 보관하면 되는 줄 알고 실수로 버렸다”고 해명했다. 그 직원은 금융범죄 수사 중점 검찰청의 핵심 부서인 가상자산범죄합동수사부 소속이었다. 이런 곳에서 초보적 실수가 나왔다는 말을 얼마나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검찰 내부에서조차 “검찰 직원인 게 부끄럽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다.
▷현금 뭉치는 김건희 특검이 수사하는 국민의힘과 통일교 유착 의혹에 관련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도 검찰은 이를 수사하는 김건희 특검에 넘기지 않았다. 증거가 사라진 걸 파악한 것도 압수 4개월이 지나서였고, 감찰도 흐지부지됐다. 당시 수사 지휘부와 대검찰청 지휘부가 쉬쉬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된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19일 주요 단서 유실과 부실 대응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감찰을 지시했다.
▷한때 검찰은 가혹하고 혹독하게 수사한다는 뜻에서 ‘가찰(苛察)’로 불린 때가 있었다. 그랬던 검찰이 뇌물 사건의 수사 단서를 잃어버리는 잘못까지 하는 지경이다. 띠지 정보로 자금 경로가 곧장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수사 단서 분실 자체가 검찰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게다가 이런 무능함이 왜 검찰총장 출신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 사건에서 드러났는지도 의심스럽다. 검찰의 기본이 이렇게 흔들린다면, 여권의 ‘검찰 해체’ 목소리에 무슨 말로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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