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이 이달 25일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비상계엄으로 인한 국민들의 정신적 피해를 배상하란 판결을 내린 걸 두고 법조계에선 의외라는 반응이 나온다. 8년 전 국민 4000여 명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국정농단 사태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배상하라고 청구했는데 1∼3심 모두 패소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설마 하는 생각에 간단한 의견서만 냈던 윤 전 대통령 측도 “국민 104명에게 위자료 10만 원씩을 배상하라”는 판결문을 받아 들고 허를 찔린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도권의 한 부장판사는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직후 동료에게 농반진반으로 ‘윤 전 대통령에게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했다”며 “충분히 내릴 수 있는 판결이라는 생각”이라고 했다. 8년 전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는 취지였는데 생각해 보니 그럴 만했다.
8년 전보다 명백한 기본권 침해
과거와 다른 판결이 나온 이유로 먼저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의 위헌성이 더 명확했다는 점을 법조인들은 꼽는다. 박 전 대통령의 경우 측근을 국정에 개입하게 하고 대통령 권한을 남용한 점, 그리고 수사를 거부하며 헌법 수호 의지를 보이지 않은 점이 인정돼 헌법재판소가 파면을 결정했다. 하나하나가 파면 후에도 형사 재판에서 법적 책임을 다투는 쟁점이다 보니 민사 재판에서 먼저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헌법상 요건인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가 없었다는 점에서 비상계엄이 위헌이란 게 누가 봐도 분명했다. 중앙지법도 판결문에서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국가비상사태가 아니었음은 물론 그 징후조차 없었다.”
두 번째로 국민 기본권 침해가 더 직접적이고 명백했다고 볼 여지가 컸다. 8년 전 소송 때는 일반 시민이 국정농단으로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원고들은 “우울증과 위장병이 재발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의견이 달라 직장에서 싸웠다” 등의 주장을 폈지만 법원에서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의 포고령은 모든 국민이 가진 ‘집회 결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었다. 중앙지법은 “국민들은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보장받아야 할 기본권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공포와 불안, 수치심 등 정신적 고통을 받았던 것이 명백하다”고 판단했다.
마지막으로 판결의 근거가 되는 대법원 판례 역시 달라졌다. 8년 전 소송에서 재판부는 과거 대법원 판례에 따라 “대통령은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대응해 법적 의무를 지는 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2022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970년대 긴급조치 9호로 입은 피해에 대한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하며 해당 판례를 변경했다.
물론 당시 대법원 판결은 일반 국민이 아니라 영장 없이 체포, 구금되거나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은 직접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중앙지법은 이번에 해당 판례를 인용하며 비상계엄이 모든 국민에게 영향을 미친 만큼 일반 국민이 입은 피해도 배상받을 수 있다고 봤다.
소송은 권력자 향한 국민 경고
윤 전 대통령 측은 29일 항소장을 제출했다. 항소심에서 윤 전 대통령 측은 비상계엄이 일반 국민에게 미친 정신적 피해를 어떻게 인정하고 위자료를 산정할 것인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문제 제기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비슷한 소송이 이어질 조짐은 확산되고 있다. 이미 1만 명 이상이 소송 비용 3만 원씩을 내며 소송에 참여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윤 전 대통령의 재산이 6억6000만 원가량임을 고려하면 이들이 승소해도 10만 원씩 받아내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호주머니를 털어 소송에 나서고 있다. ‘패가망신하지 않으려면 비상계엄 같은 무도한 일은 꿈도 꾸지 말라’는 준엄한 경고를 권력자들에게 보내겠다는 취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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