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의 소식이었다. 8월 12일 중국 정부가 자국 기업에 엔비디아 인공지능(AI) 반도체 ‘H20’ 사용 금지를 통보했다. 4월 H20의 중국 수출을 막았던 미국 정부가 규제를 풀어준 지 한 달 된 시점이었다. AI 훈련을 위해선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 확보가 필수인 상황. 수출 재개를 반겨야 할 중국 정부가 오히려 이를 막고 나선 게 이상했다.
중국 정부의 의도는 이거였다. 엔비디아 대신 중국산 AI 반도체를 써라. 8월 말 중국 기업의 깜짝 발표가 줄줄이 나왔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AI 스타트업 딥시크가 화웨이 칩 사용을 결정했다. 알리바바는 AI 추론 작업에 특화된 신형 칩을 자체 개발했다. AI 반도체 제조사 캠브리콘 테크놀로지스는 1년 전보다 4300% 증가한 상반기 매출과 함께 설립 뒤 첫 흑자 전환을 발표했다.
미국 수출 통제의 예기치 못한 효과
중국이 AI 전용 반도체 제조에 나선 지는 오래됐다. 중국 국영기업 투자를 받은 캠브리콘이 세계 첫 상업용 AI 칩을 선보인 게 2017년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존재감을 발휘하진 못했다. 엔비디아라는 탁월한 기업이 시장을 독식했기 때문이다.
중국 기술기업도 성능 면에서 가장 뛰어난 엔비디아 칩만 쓰려고 했다. 중국산 칩을 쓰려면 그에 맞춰 소프트웨어를 새로 개발해야 하는 점도 부담이었다. 엔비디아의 공고한 성은 웬만해선 깨지지 않을 것 같았다. ‘중국판 엔비디아’로 불린 캠브리콘을 포함한 중국 AI 반도체 제조사들이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쏟아부었지만 소용없었다. 이대로 적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사라질 운명처럼 보였다.
그런데 동아줄이 내려왔다. 미국의 AI 반도체 수출 규제였다. 엔비디아 A100, H100 같은 첨단 AI 칩의 중국 수출이 2023년 9월 완전히 막혔다. 중국 기술기업의 각성이 시작됐다. 언제 어디로 번질지 모르는 미국의 반도체 수출 통제. 이대로 계속 엔비디아에만 의존하면 위험할 수 있었다.
2024년 틱톡 모회사 바이트댄스가 캠브리콘의 최신 AI 칩을 선택했다. 엔비디아 GPU만 고집하던 바이트댄스가 중국산 칩을 병행해서 쓰기로 전략을 바꾼 것이다. 이어 화웨이·알리바바 같은 대기업도 잇달아 첨단 AI 칩을 내놓았다. 미국의 수출 규제로 생긴 공백 덕분에 중국산 AI 반도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겼다.
‘중국이 중국을 산다’ 전략
이제 중국 정부까지 노골적으로 중국산 AI 칩 밀어주기에 나섰다. 주식시장은 환호했다. 8월 들어 캠브리콘 주가가 수직 상승하며 시가총액이 115조 원(5878억 위안)으로 불어났다. 상반기 매출이 SK하이닉스의 1.4%밖에 안 되는 기업인데 시총은 58%나 된다.
물론 중국의 AI 반도체 성능은 엔비디아 첨단 칩엔 여전히 못 미친다. 런정페이(任正非) 화웨이 회장도 “우리 반도체는 여전히 미국보다 한 세대 뒤처져 있다”고 말한다. 가격은 더 저렴하지만, 치열한 AI 기술 경쟁을 벌이는 기술기업으로선 그리 매력적인 제품은 아니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미중 갈등이 중국 기업의 선택지를 줄인다. 중국 정부의 의도대로 ‘중국이 중국을 사는’ 전략이 AI 반도체 시장에서도 작동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다른 제조업-가전과 로봇청소기, 드론, 전기차도 그렇게 컸다. 기술이 좀 부족해도, 세계 수준에 못 미쳐도 제품을 사줄 내수시장이 초기부터 확보돼 있었다. 일단 제품이 팔리면 기업은 그 돈을 연구개발에 쏟아부어 기술력을 한층 끌어올렸다. 중국 특유의 자급자족 선순환 사이클이 갖는 힘이다.
무어 스레드, 비렌 테크놀로지, 메타 엑스, 엔플레임 등 중국엔 아직 상장도 되지 않은 AI 제조 스타트업이 여럿이다. 진짜 ‘중국판 엔비디아’로 올라서기 위한 중국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질 것이다. 누가 승리자가 될진 알 수 없지만 벌써부터 조금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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