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 없는 나라, ‘사고 대응’에서 ‘위험 예방’으로[기고/김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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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한국보건복지학회 회장·원광대 명예교수
김종인 한국보건복지학회 회장·원광대 명예교수
올해 1분기 산업현장에서 사고로 숨진 노동자는 137명(잠정)에 달한다. 특히 업종별로 건설업 사망자는 71명으로 전년 동기보다 10.9% 증가했다. 총 사고 사망자의 60%(83명)는 50인 미만 영세사업장에서 나왔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 2년이 지났지만 현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국가가 생명과 안전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지만,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산업현장이 적지 않다.

산업재해는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산업현장의 구조적 실패이자 국가의 책임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 “산업재해는 막을 수 있는 죽음”이라며 “국가는 그 책임에서 도망칠 수 없다”고 강조해 왔다. 노동존중 사회, 생명존중 국가, 예방 중심의 책임국가는 현 정부의 핵심 국정철학이다. 이러한 원칙이 산업안전 제도 전반에 실질적으로 구현되려면 단일 부처의 대응을 넘어 국정 어젠다로 다뤄야 한다.

마침 국정기획위원회가 14일 발표한 이재명 정부의 123대 국정과제에 ‘산업재해 국가책임 실현’이 포함돼 있다. 구체적인 실현 방안을 몇 가지 제안해 본다.

첫째, 산재 사망 감축을 법적 국가 목표로 명시하고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련 부처가 공동으로 이행하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상당수 국가는 산재 감축 목표를 법제화해 부처별 이행 실적을 공개하고 있다. 우리도 이제 ‘사고 이후 대응’이 아니라 ‘위험의 사전 예방’ 중심으로 사고방식을 전환해야 한다.

둘째, 중대재해처벌법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적 정비가 시급하다. 특히 영세사업장은 구조적 취약성이 그대로 방치돼 있으며, 경영책임 이행도 미비하다. 단순한 처벌 중심이 아니라 안전 투자 유인을 제공하는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 안전관리비 실비 인정, 중소기업 안전지원센터 설치, 지자체·공공기관 공동 점검 체계 구축 등이 실행 가능한 방안이다.

셋째, 산재보험의 보편성과 접근성을 확대해야 한다.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고령·장애인 노동자 등 비정형 근로자는 여전히 제도 밖에 있다. 자동가입 제도 도입, 직업병 인정기준 개선, 신청 절차의 디지털화는 국민 수용성이 높고 제도 신뢰 회복에도 도움이 된다.

넷째,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 기반 건강관리 기술을 산업안전에 접목해야 한다. 스마트 헬멧, 웨어러블 장비, 생체신호 기반 위험 예지 시스템은 이미 기술적으로 구현 가능하다. 이를 산업안전 연구개발(R&D) 예산과 연계해 제도화하면 디지털플랫폼 정부와 과학 기반 국정 운영이라는 현 정부의 철학과도 부합한다.

다섯째, 산업안전은 더 이상 고용부만의 과제가 아니다. 산재는 건강 격차의 출발점이며 복지비용과 지역 돌봄체계로도 직결된다. 산업현장의 위험을 줄이고 국가가 그 책임을 떠안는 시스템 설계가 복지국가의 출발점이다.

산업재해를 줄이는 일은 법과 제도, 기술과 행정, 예산과 실행이 모두 함께 움직일 때 가능하다. 정부가 강조해 온 ‘생명 보호 중심 국정운영’은 현장에서부터 실현돼야 한다. 국민은 더 이상 선언이 아닌, 실제로 생명이 보호되는 국가를 원한다. 이는 비용이 아니라 국가의 품격을 높이고 국민 신뢰를 회복할 가장 확실한 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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