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소연]악성민원을 악성민원이라 부르지 못하는 공무원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8월 28일 23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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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악성민원’ 대신 ‘특이민원’이라 칭해
민원인 다 악성 취급한다는 반발 제기된 탓
민원지옥에도 욕설 전화 먼저 못 끊는 현실
공무원까지 보호해야 ‘모두가 안전한 사회’

정소연 객원논설위원·변호사·SF작가
정소연 객원논설위원·변호사·SF작가
얼마 전 법원에서 험한 말을 들었다. 변호사 공익활동인 국선변호인 업무 수행 중이었다. 피고인은 법정에서 나오며 내게 “이게 징역 살 일이냐”고 언성을 높이며 거친 욕을 했다. 검찰의 구형이 자신의 예상보다 높은 것이 원인이었다. 양형 범위 내의 구형이었다. 가만히 서서 욕을 들었다. 한마디 반박하면 백 마디 더 들을 것을 경험치로 알기 때문이다.

소란스러워지자 법정 경위가 나왔다. 그의 대응은 “여기서 큰소리를 내면 법정 안이 시끄러우니 조용히 하세요”라는 게 전부였다. 법정 안에도 민원인들이 있는데 법정 경위는 한 명뿐이니 어쩔 수 없다. 피고인은 법정 문에서 몇 발짝 떨어진 곳으로 나를 끌고가 남은 욕을 쏟아냈다. 결국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제가 구형을 했나요. 검사한테 가서 따지세요.” 좋은 대응은 아니었다. 그가 정말 검찰청으로 가면 검찰청에 민원인이 한 명 더 늘어나고, 누군가 다른 사람 아마도 검찰청 1층 종합민원실 공무원이 내가 들은 욕을 들어야 할 것이다.

나는 행정심판 업무도 하는데, 행정심판에서 일방에게 불리한 판정을 했다는 이유로, 또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민원에 시달리게 되는 동료들을 본다. 직접 소명서를 써야 했던 적도 있다. 민원인은 내가 공학박사도 아니면서 자료를 모두 이해했다고 거짓말을 했고, 뇌물을 받았고, 자신을 조롱했다고 억지 주장을 폈다. 그의 허위 민원 하나로 그 사건을 거쳐 간 모든 위원과 담당 공무원이 소명서를 써야 했다. 경력이 많은 동료는 허탈하게 웃으며 “무조건 잘못했다고 써요. 나는 그냥 빌고 말아”라고 조언했다.

정부는 요즘 ‘악성 민원’이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대신 ‘특이 민원’이라고 부른다. 악성 민원이라는 표현이 너무 부정적이라는 의견과 함께 모든 민원인을 악성 취급하는 것 아니냐고 반발하는 또 다른 ‘특이’ 민원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언, 폭행, 성희롱 같은 특이 민원을 예방하자’고 쓰인 캠페인 포스터를 보며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폭언, 폭행, 성희롱은 명백한 위법행위다. 범죄행위조차 악성이라고 칭하지 못할 정도로 민원 대응과 처리 과정이 왜곡돼 있다면 대체 개인이 이를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가. 캠페인 포스터에 쓰인 예방법은 상담을 종료하는 것이다. 몇 년간 비상임으로 일했던 모 공공기관에는 항의하는 민원인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때로는 종일 직원 앞에 버티고 있었다. 조사를 해라 마라, 인정해라 마라, 빨리 해라 천천히 해라, 내가 퇴근한 후에 해라, 내가 출근하기 전에 해놔라, 전화로 해라, 카카오톡으로 해라…. 물리적으로 다 들어주기 불가능한 민원들이 쏟아졌다. 이들과의 상담을 대체 어떻게 ‘종료’할 수 있는가.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 올해 6월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의 34.11%, 교육청 공무원의 42.86%가 ‘민원인이 욕설, 성희롱, 폭언을 해도 전화를 강제로 종료할 수 없다’고 답했다. 실제로 강제 통화 종료 사례가 있었는지를 묻자 지자체 공무원 40.31%, 교육청 공무원 14.29%만이 실제 사례가 있다고 했다. ‘민원 처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4조에 따르면 강제 통화 종료나 강제 퇴거를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 정도의 조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전화도 못 끊는데 강제 퇴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누구도 이런 위험한 업무 환경에 노출돼서는 안 된다. ‘적극행정’은 온갖 민원을 들어오는 대로 다 상대해 줘야 한다는 개념이 아니다. 모두가 안전하게 일할 권리는 공적 영역에도 존재하고, 국가에는 공무를 하는 모든 사람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책임이 있다. 특이 민원을 제기하지 말라고 달래는 대응, 권고 수준으로만 도입된 공무원 보호조치로는 물리적·정신적 위험에 노출된 실무자들을 제대로 보호할 수 없다.

부적절한 민원에 대한 기관 차원의 고소·고발, 공무직 같은 비전문 인력이 아닌 전문적인 안전경호 인력 충원, 특이 민원 피해자들을 위한 전담 부서의 역할과 권한 확충 등을 계획과 권고만 하지 말고 실제로 힘을 실어 시행해야 한다. 부서장의 민원 종결 권한이 산재 예방과 같은 보호조치라고 인식해야 한다. 또 공식적인 민원 대응 창구를 정비해야 한다.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전화 한 통이라도 좀 마음 편히 끊을 수 있고, 보복당할 걱정 없이 “욕하지 말라”고 말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가 단호한 대처로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까지 보호해야 모두가 안전한 사회, 일하다 죽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다.
#동아광장#악성민원#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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