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리더십 약화 대비 외교 다각화 고려할 때
이번 회담 수년간 이어질 거래-협상 출발점
눈앞 손익 넘어 첫발 제대로 뗐느냐가 관건
전재성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 결과를 앞두고 있다. 외국 정상들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날 때 저마다의 전략을 구사해 왔다. 트럼프가 제시하는 잘못된 통계를 직접 교정하거나 반박하기도 하고, 다양한 유화책을 내놓으며 대가를 챙기기도 한다. 때로는 만남 자체를 회피하기도 한다. 그러나 핵심은 미국과 최대의 공통 이익을 찾아내고 미국의 지속적 리더십을 설득하는 동시에 미국의 리더십을 당연시할 수 없을 경우에 대비한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트럼프 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대미 외교에서는 치열한 협상이 지속될 것이다. 이제 대미 관계를 원활히 유지하려면 다양한 정책 수단, 즉 카드가 필요하다. 미국에 필수불가결한 파트너가 되는 것도 카드지만, 미국 외의 파트너들과 함께 협력하며 대안적 질서를 모색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미국 내에서도 트럼프 시대를 지나면 미국 패싱의 국제질서가 굳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벌써 제기되고 있다. 다각화된 외교는 이제 대미 외교의 필수 조건이 되고 있다. 대미 외교를 강화하려면 역설적으로 외교의 다각화를 통해 대안을 넓혀야 하는 시대다.
23일 열린 한일 정상회담은 단순히 양국 관계 개선을 넘어 대미 외교의 전략적 지렛대가 될 수 있다. 미국과의 협상에서 한국이 더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첫째, 한일 협력은 한미일 3자 협력 지속의 의미를 지닌다.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확대된 협력틀은 트럼프 행정부 들어 약화됐지만, 여전히 안보·경제·기술 전반에서 협력의 이익은 크다. 둘째, 한일 공조는 미국의 압박에 대응하는 수단이다. 중국 견제라는 전략적 차원과 미국 중심의 경제적 압박 정책에 공동 대응하는 차원을 모두 포함한다. 셋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이후 일본이 추진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처럼 미국 없는 질서의 실마리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미국의 참여를 전제로 하지 않고도 안보·경제 협력을 지속할 수 있는 대안을 탐색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대일 외교는 단순한 양자 관계의 강화가 아니라 대미 외교를 다각화하는 실험장이며, 한국 외교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로 주목된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중요한 것은 국제질서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다. 미국 국채가 역대 최고로 치솟고 세계 리더십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미국도 만족할 새 틀을 모색해야 한다. 이른바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원칙과 규범에 따라 운영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1, 2차 세계대전의 치열한 전쟁을 거친 뒤 강대국들이 세력 공백을 메우려 벌였던 처절한 거래와 협상이 지금의 질서를 형성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여전히 지정학적 정글의 원리에 기초하며 끊임없는 거래와 협상이 필요하다.
문제는 지난 30년간 국제질서를 흔드는 엄청난 변화 요인들이 등장했지만, 이에 상응하는 선제적 협상이나 거래가 거의 부재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혼란은 거래 중심 질서 때문이 아니라, 충분한 거래와 협상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초래된 측면이 크다. 이제라도 본격적인 거래와 협상이 시작돼야 한다. 이 과정은 단순히 국익을 추구하는 실용외교를 넘어, 새로운 질서를 위한 비전외교로 이어져야 한다. 비전외교는 미래 질서를 설계하고 국제사회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과정으로, 눈앞의 이해득실을 넘어 한국이 제시하는 비전이 새로운 질서의 방향을 규정하는 기준이 돼야 한다.
한국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국가다. 미국의 핵심 동맹인 동시에, 미중 전략 경쟁의 한복판에서 가장 큰 압박을 받고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 유지에 가장 큰 이익이 걸려 있고, 문화적으로도 세계 표준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 문화는 이제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아 세계인들이 그 장르를 직접 연주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외교 질서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이 제시하는 질서가 하나의 장르가 돼 많은 국가들이 참여하고 연주하는 국제질서로 만들어야 한다.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를 두고 손익 외교의 관점에서 평가가 이뤄지겠지만, 진정한 기준은 따로 있다. 미국을 상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를 향해 대안적 질서를 내보이는 새로운 외교의 장르를 창출했는가 하는 점이다. 미국으로부터 어떤 과제를 받아 왔는가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이어질 대미 외교에서 첫걸음을 제대로 내디뎠는가가 더 중요하다. 이번 회담은 향후 수년간 이어질 거래와 협상의 출발점이다. 미래 질서를 형성하는 협상에서 어떤 전략을 추구할지 숙고하면서 외교의 중장기 로드맵을 마련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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