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원호]위험을 피하는 대학, 한국 미래 잃는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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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분야 ‘위험회피’로 움츠러든 사회
캠퍼스마저 공정과 안전한 선택에 매몰
미래 위해 대학들 ‘도전의 장’ 돼야
‘위험 사회’ 넘을 적극적 역할 필요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대학이 맞는 가을학기는 분주하다. 결실의 계절인 가을이 되면 각 대학에선 온갖 종류의 입시가 펼쳐진다. 수십 가지 전형들로 이뤄진 학부 입시생뿐만 아니라 로스쿨을 포함한 각종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석사, 박사 지망생들의 합격 열망이 캠퍼스를 채운다. 이번 가을학기에도 입시 서류를 받아 검토하고, 학생들을 면접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이 가장 중요한 입시기관이 돼 버린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가을의 대학은 또 인력 양성소 같기도 하다. 학교를 떠나 사회로 진출하는 졸업반 학생들은 캠퍼스의 마지막 가을 결실을 거두고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한다. 대학은 초중고를 거쳐 사회로 나아가는 직업교육의 한 절차에 지나지 않게 됐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세상 모든 것들이 그러한 것처럼, 대학도 그 기능과 효용, 성과에 따라 평가되고 정리되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학생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평탄화 작업을 한 후에 합격자를 선발하는 것처럼, 대학들도 일렬로 줄 세워진 채 평탄화 작업을 거쳐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우리는 ‘위험회피(risk aversion)’가 가장 중요한 운용 원리인 대학을 가지게 됐다. 위험회피란 예컨대 이런 것이다. 불확실하지만 큰 성취보다는 작더라도 확실한 결과를, 리스크가 있는 불확실한 미래의 ‘대박’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안정적인 ‘현금’을 선택하려는 성향을 말한다. 개인 자산을 위해서는 중요한 삶의 지침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을 키우고 꿈을 가꿔야 할 대학의 정신과 들어맞는지는 의문이 든다.

대학 입시 정책의 제1원칙은 99명의 훌륭한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 아닌 단 1명이라도 공정성 시비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됐다. 학생을 위한 조그만 시설 하나를 갖추려고 해도 수개월이 걸리는 공개입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학의 정신이 ‘고독과 자유’라는 독일의 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주장처럼 과감한 패기는 고사하고, 오늘날 대학의 정신은 ‘위험회피’가 돼 버린 듯하다.

위험회피가 제1원칙인 곳에서는 그 누구도 새로운 꿈을 꿀 여력이 없다. 꿈을 꾸기는커녕 대학은 실패하지 않는 안전한 길, 늘 다니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 길을 벗어나 약간의 문제라도 생기는 순간 교육부와 언론, 학부모와 학생의 질타를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만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며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하는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인재를 뽑고 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사람을 믿고 어둠 속에서 벼랑 끝에 발을 내딛는 것과 다르지 않다. 더군다나 인공지능(AI) 혁명을 포함한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패러다임이 바뀌는 역사의 순간에서 교육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을 누가 알겠는가. 확실한 것은 우리의 대학이 이러한 변화에 미리 대처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도, 의사도 없다는 점이다.

대학의 위험회피는 구성원들에게도 그대로 전염된다. 풀리지 않을지도 모를 긴 호흡의 난제들을 시작하는 것보다는 특화되고 세절된, 이른 시일 내 결말이 보이는 과제를 택하는 것이 연구자 입장에선 유리할 것이다. 그 대가로 우리 대학은 큰 이야기, 장기적 비전을 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젊은이들조차 미래의 불확실성과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의대와 로스쿨에 진학하려 한다. 다른 전공으로 입학했다가도 이들 학과에 가기 위해 ‘반수’를 거듭한다. 이러한 세태와 젊은 세대에 대해 비판하고 탄식할 수 있을까. 그러기엔 우리 사회는 이미 위험회피 구조가 만연해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1944∼2015)가 1980년대에 이미 이야기했던 ‘위험 사회’ 이야기가 적절할지 모르겠다. 이전 사회에서 불평등과 빈곤을 해결하는 것이 주된 사회적 과제였다면 이제는 개인들이 스스로 불안과 위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핵심적인 과제가 됐다. 환경, 금융, 고용 등 현대 사회의 예측할 수 없는 두려움들에 덧붙여 국제 정세나 AI 시대의 도래를 생각하면 당장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개인이 짊어지지 못하는 각종 리스크가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개인이 위험회피 전략을 택하는 것은 생존본능일지 모른다.

이런 불확실성은 개인은 물론이고 개별 기업과 국가에도 영향을 미친다. 역설적이지만 그나마 대학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믿고 맡긴다면 현재의 위험회피 상태를 넘어 새롭고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의외로 우리의 미래가 여기에 걸려 있는 셈이다.

#대학#가을학기#입시#위험회피#인재양성#교육패러다임#사회불확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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