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허정]美 요구 앞에 선 한국, 日 대미투자 40년 경험서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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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조건 문제있지만 두려움 매몰돼선 안돼
日, 플라자합의 후 대규모 직접투자로 대응
美에 ‘현지화 생태계’ 구축, 성과 돌려받아
‘돈 넣는 서명’ 말고 ‘성공 설계 서명’이 관건

허정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허정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한국은 관세를 내든지, 아니면 합의를 받아들이든지 양자택일하라.”

최근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의 발언은 한미 관세 및 투자 협상이 교착 상태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7월 30일 어렵게 합의한 상호관세 15% 체제가 불과 몇 주 만에 다시 흔들리고 있다.

미국은 자국 내 특수목적법인(SPC)을 설립해 대미 투자금 전액인 3500억 달러(약 486조 원)를 현금으로 채우고, 필요할 때마다 45일 이내 집행할 수 있도록 한국에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익 배분도 원금 회수 전에는 한국이 90%, 미국이 10%를 가져가지만, 회수 이후에는 미국이 90%를 가져가고 한국은 10%만 받는 방안이 거론된다. 이런 조건에 한국 정부가 합의안 서명을 주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막연한 두려움과 부정적 정서에 매몰돼서는 답을 찾기 어렵다. 우리는 40년 전 일본의 경험에서 교훈을 찾을 필요가 있다. 1985년 9월, 일본은 플라자 합의 이후 엔고 충격을 맞으며 수출 중심 성장 전략에 제동이 걸렸다. 일본 기업들은 이를 위기로만 보지 않고 대규모 미국 직접투자로 대응했다. 공장을 세우고, 부품·소재 공급망까지 동반 진출시켜 현지 고용을 창출하며 지역사회에 뿌리내렸다. 단순한 자금 투입이 아니라 생산·판매·연구개발(R&D)·서비스를 아우르는 ‘현지화 생태계’를 구축한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은 오늘날 미국 내 최대 투자국으로 자리 잡았다. 2024년 말 기준 대미 직접투자 누적액은 7500억 달러를 넘어섰고, 미 제조업 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은 고용과 산업 경쟁력을 회복했고 일본은 배당, 로열티, 기술표준, 글로벌 위상을 되돌려받았다.

한국도 이제 미국 내 투자가 급증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2023년 기준 한국의 해외 직접투자 가운데 미국 비중은 43.7%로 사상 최고 수준이다. 반도체와 배터리 등 전략산업 분야 진출이 확대되며 현지 사업장도 크게 늘고 있다. 수출과 투자가 맞물리면서 한국 경제와 기업에 새로운 성장경로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미국이 요구하는 방식은 우리가 구상하는 기업 주도형 경영 투자와는 거리가 있다. 한국은 공장 설립과 경영 활동을 통한 장기 성과를 지향하지만, 미국은 거액 자금을 SPC에 예치해 필요 시 즉각 집행하기를 원한다. 게다가 투자금 회수 이후 한국이 사실상 소수 지분만 인정받는 구조라면 장기적으로 기업의 인센티브가 약화될 수밖에 없다.

경제 성장 이론의 관점에서도 단순 자금 투입만으로 성과를 거두긴 어렵다. 내생적 성장 이론은 자본 축적보다 지식, 기술, 조직, 네트워크가 총요소생산성(TFP)을 끌어올린다고 강조한다. 일본의 성공 역시 거대한 현금 투입이 아니라 독특한 경영, 우수한 기술과 인력, 공급망 일체화 등 ‘산업 생태계’ 설계에서 비롯됐다. 자금의 양이 아니라 질, 즉 어떻게 운영되고 배분되며 재투자되는지가 성패를 갈랐다. 따라서 한국이 이번 협정에 서명한다면 단순히 ‘돈을 넣는 서명’이 아니라 ‘성공을 설계하는 서명’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일본의 대미 투자 40년 경험에서 한국이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투자 배분 구조는 고정식이 아닌 성과 연동형으로 교섭해야 한다. 초기 리스크를 크게 지는 한국 기업에는 원금 회수 전 우선 배당을 보장하고 이후에는 고용 창출, 공급망 안정, 재투자 성과에 따라 배분을 유연하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

둘째, SPC 요구는 일정 부분 수용하되 운용권을 확보해야 한다. 투자위원회 동수 거버넌스, 분기별 리포트와 감사권, 환리스크 관리와 세제 처리까지 협정 부속서에 담아야 한다. 셋째, 일본처럼 단일 공장에 그치지 않고 부품, 소재, 장비 기업까지 동반 진출하는 ‘서플라이 체인 현지화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 넷째, 배당과 로열티가 원활히 본국으로 환류될 수 있도록 국내 세제와 금융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미국은 일본과의 합의를 모델 삼아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 협상 테이블은 벼랑 끝 대치 상태다. 일본의 40년은 단순히 서명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현지화 생태계를 구축했고, 오늘날 그 성과를 누리고 있다. 한국도 이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우리는 서명해야 하는가? 답은 ‘그렇다’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서명하느냐다. 이번 서명이 단순히 거액 자금을 묶어두는 종이 한 장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거버넌스와 배분, 환류와 생태계가 설계된 ‘현명한 서명’이어야 한다.

#한미관세협상#대미직접투자#SPC#투자배분구조#현지화생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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