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고 나서야 그 진가를 깨닫는 것들이 있다. 2012년 발효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그중 하나가 될 것 같다. 추진 당시의 진통은 극심했다. 한일 강제합병을 낳은 ‘을사조약’이나 마찬가지라는 반발 속에 거리 집회가 이어졌고, 국회 표결 날에는 최루가스가 터져 본회의장이 아수라장이 됐다. 주요 산업이 무너질 것이라는 경고도 연일 쏟아졌다.
하지만 격렬했던 사회적 반대와 우려와는 달리, 1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FTA는 ‘대미(對美) 수출의 버팀목’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한국의 대미 수출은 2012년 586억 달러에서 2024년 1278억 달러로 불어났고, 무역수지 흑자는 557억 달러로 껑충 뛰었다. 미국은 한국의 ‘최대 흑자국’으로 부상했고, 현대자동차 등 주요 기업들도 FTA를 발판삼아 미국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웠다. 온라인상에서는 “그때 반대하던 FTA가 결국 한국 경제의 히어로였다”는 ‘FTA 재평가론’까지 오르내린다.
그랬던 한미 FTA가 이번 관세 협상으로 13년 만에 사실상 힘을 잃게 됐다. 특히 자동차 분야의 타격이 크다. 과거 FTA 덕분에 한국산 자동차는 일본 유럽이 2.5% 품목 관세를 내는 동안 무관세 혜택을 톡톡히 누리며 가격 경쟁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이제 동등하게 15% 관세를 적용받게 됨에 따라 과거와 같은 ‘가성비’ 전략을 구사하기는 힘들어졌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FTA 틀을 벗어나게 된 터라 준비도 부족했다. 투자업계 등에 따르면 지난해 현대차의 현지 생산 비중은 43.0%에 그친다. 반면 일찌감치 1980, 90년대부터 미국 생산라인을 확대해온 일본 도요타는 52.3%, 혼다는 80.3%, 닛산도 63.6%를 미국 공장에서 만들어 낸다. 무관세 때문에 우리의 현지화 전략이 늦어진 결과다. 같은 관세 15%라면, 현지 생산 비중이 낮은 우리에게 타격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결국 해법은 하나다. 잃어버린 관세 혜택을 대체할 경쟁력을 만들어야 한다. 현지 생산 확대, 공급망 업그레이드, 연구개발(R&D) 투자 강화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과제다. 최근 현대차가 미국 빅3 완성차 기업인 ‘라이벌’ 제너럴모터스(GM)와 신차 공동 개발을 위해 맞손을 잡았듯이 과거 같으면 상상도 못 했을, 파괴적인 혁신 시도도 계속되어야 한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과거에도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경험이 있다. 1999년 현대차는 경쟁자들이 ‘2년, 2만4000마일 보증제’를 운영할 때 ‘10년, 10만 마일 무상보증제’를 도입해 미국 시장에 화제를 일으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 자동차 수요가 급감했을 때는 구매 후 1년 안에 실직하면 차를 되사주는 ‘어슈어런스 프로그램’을 내놓으며 점유율을 확대하기도 했다.
FTA 혜택은 끝났고, 이제 진정한 진검승부의 시작이다. 보호막 없이 시장 한가운데 서서 독자적인 경쟁력을 증명해야 한다. 10년 뒤, 지금의 선택이 한국 자동차 산업을 결정지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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