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추리 소설가 프레더릭 포사이스(1938∼2025)는 BBC, 로이터 등의 언론사에서 활약한 심층 잠입 취재 기자였다. 그는 자신의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스릴러 작품을 써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은 리얼리티로 유명하다. 어느 도시의 풍경을 묘사할 때면 모퉁이의 담배 가게까지 있는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일각에선 그의 강한 정치적 성향에 반감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현실 세계의 냉혹한 국제 정치 등을 지적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체제를 가리지 않았다.
오래전 작품이지만 데탕트가 시작되고, 냉전 체제가 허물어져 갈 때를 배경으로 한 그의 소설이 있다. 냉전 종식 후 각국은 정보 당국 축소 작업에 나선다. 영국 대외 정보부인 MI6의 차기 정보국 수장으로까지 거론됐던 유능한 요원도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마지막 임무를 마치고 퇴역한 그가 시골에서 낚시를 즐기던 중, 전 세계에서 국지전이 발발하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그 소식을 듣고 주인공이 크게 웃는 장면으로 소설이 끝난다.
그 후에 쓰여진 작품은 읽은 것이 없어서 주인공이 다시 복직해서 활약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장면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포사이스를 존경해서가 아니다. 미국이나 소련 같은 패권국이 사라지면 세상에 평화가 온다고 믿는 지식인들을 수도 없이 만났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악도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경우도 의외로 많았다.
희한한 건 아무리 역사적 사례를 들어 설명해도 한번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절대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중 다수는 역사학자들이었다. 최근 미국 러시아 중국 등이 자기 앞가림에 바빠진 가운데 일부 국가에선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도 심상치 않다. 아직도 패권국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그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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