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제조업 재건과 反中’ 목표 WTO 끝장내
정상급 산업 지렛대 삼아 당당히 대미 협상
美中 경쟁 관찰하며 신중히 대중 외교해야
안세영 서강대 국제대학원 명예교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폭탄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갈 ‘쓰나미’라면, 이른바 ‘턴베리 체제’는 세계무역기구(WTO) 자유무역 체제의 판을 뒤엎는 역대급 ‘지각 변동’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7월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유럽연합(EU) 대표와 무역협약을 맺으며 간판을 내건 턴베리 체제의 핵심은 미국 제조업 재건과 반(反)중국이다. 이는 미국의 WTO 체제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된다. 허점투성이 다자 체제 때문에 지난 30년간 미국은 제조업이 무너지고 무역적자의 늪에 빠진 반면, 중국은 불공정 무역을 통해 최대 승자가 됐다는 것이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워싱턴의 순진한 ‘차이나 드림’과 베이징의 성급한 ‘중국몽’이 엇박자를 치며 만들어 낸 WTO 체제의 종말이다. 시장경제국이 아니어서 가입 자격이 없다고 서방 세계가 반대하는 것을 물리치고 중국을 가입시킨 것은 당시 워싱턴의 ‘차이나 드림’이었다. 자유무역으로 경제가 발전하면 중국이 개방과 민주화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오판했다. 그런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미국을 앞서겠다는 중국몽을 내세우며 미중 관계는 꼬이기 시작했다.
세계 자유무역의 주도국으로서 미국은 케네디, 도쿄 라운드 등을 통해 관세를 꾸준히 인하했다. 그런데 트럼프의 공세적 양자 협상 체제에서 관세 인상이 미국의 국익을 추구하는 ‘전가의 보도’로 변질됐다. 관세 인상과 보복 위협을 통해 외국 시장을 개방하고 외국 자본의 투자를 유도해 미 제조업을 재건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턴베리 체제에서 국익 우선 보호주의, 보복적 양자주의가 판칠 것을 우려하는 먹구름이 우리 경제를 짓누르고 있다. 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우리의 대응 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정부와 기업의 신(新)전략적 동반자 관계이다. 지금까지 정부와 기업은 각자도생했다. ‘어느 나라에 투자해 공장을 지을지’는 기업의 고유한 권한이고, 정부는 단지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관세를 내리는 소극적 역할만 했다.
그런데 이제 어느 기업도 워싱턴의 정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섣불리 잘못 투자하고 거래했다간 미국의 경제 제재와 수출 통제의 덫에 걸려 곤욕을 치른다. 대표적인 예가 눈치 없이 중국에 아이폰 생산을 ‘몰빵’했다가 고전하는 애플이다. 이에 정부와 기업이 각종 정보를 공유하고 같이 손을 잡고 미국과 협상하는 민관 복합 통상 체제를 가동해야 한다.
둘째, 우리의 3대 핵심 전략산업을 잘 활용한 당당한 대미 협상 전략이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미국에 마냥 매달리는 ‘만년 을(乙)’인 나라가 아니다. 미중 패권전쟁에서 핵심고리 역할을 하는 반도체, 조선, 2차전지 산업에서 세계 정상을 달리고 있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도 뉴욕타임스(NYT) 기고에서 “황폐해진 미 조선업의 재건을 위해선 K조선이 필요하다”고 실토했다. 오죽하면 우리 조선과 협력하기 위해 케케묵은 존스법, 번스-톨레프슨법의 개정을 서두르고 있겠는가. 미 제조업 재건을 외치는 턴베리 체제에서 강한 우리 제조업만큼 좋은 협상 카드가 없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셋째, 지금까지의 연미화중(聯美和中), 즉 미국과 동맹하고 중국과는 친하게 지낸다는 줄타기 외교가 힘들어지고 선택의 압력이 거세질 것이다. 우리 기업은 진작에 차이나 리스크를 감지하고 스마트폰, 가전 등의 생산기지를 베트남, 인도로 옮겼다. 하지만 정부는 한중 관계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지난봄 메가톤급 관세 폭탄으로 치열한 치킨게임을 하던 미중 두 나라가 스위스에서 관세 부과를 90일 잠정 유예하고, 다시 90일 추가 연장했다. 이는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 때문에 관세 전쟁이 만만치 않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부는 이 같은 초강대국의 힘겨루기를 면밀히 관찰하면서 서두르지 말고 전략적으로 대중(對中) 행보를 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턴베리 체제도 트럼프 임기가 끝나면 용두사미가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붉은 중국이 변하지 않는 한 ‘미 제조업 재건-반중’을 내건 트럼프 무역질서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는 갈수록 강해지는 ‘워싱턴 콘센서스’ 때문이다. 공화당, 민주당을 불문하고 초당적으로 ‘지금 날뛰는 차이나의 고삐를 잡지 않으면 언젠가 미국이 당할 것’이라는 위기감에 젖어 있다. 이미 척수에서 앞선 중국 해군의 무서운 팽창을 보고 미국은 일본제국 해군에 당한 ‘진주만 트라우마’를 되새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역사를 보면 세계 무역 체제는 패권국이 정한다. 전후 80년 미국이 자유무역을 주도했지만 더 이상 미국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해, 이제 새로운 턴베리 체제로 방향을 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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