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현 칼럼]트럼프의 ‘관주성’, 이재명의 ‘재주성’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5월 6일 23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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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발등 찍은 美 정부 ‘관세 만능주의’
트럼프와 참모들의 그릇된 인식이 원인
돈 풀기에 대한 李후보의 과도한 신뢰
수많은 국가과제 재정만으로 해결 안 돼

박중현 논설위원
박중현 논설위원
“관세는 외국에 대한 세금 인상(tax hike)이고, 미국인에겐 세금 감면(tax cut)이에요. 당신이 제 경제 지식을 테스트하려고 하는 건 모욕이라고 생각해요.” 3월 미국 백악관 브리핑에서 캐럴라인 레빗 대변인이 AP통신 기자를 향해 속사포처럼 쏟아낸 말이다. “관세 내본 적 있나. 관세는 외국이 아닌 우리(미국 소비자)가 내는 거다”란 질문에 레빗이 발끈한 이 장면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참모의 ‘남다른’ 경제 상식을 입증하는 ‘밈’이 됐다.

레빗의 말이 다 틀린 건 아니다. 물건이 비싸 안 팔릴 것 같으면 외국 수출업체는 자기 마진을 줄여 관세 부담을 떠안기도 한다. 관세를 걷어 식당, 카페 종업원 팁에 붙는 소득세를 깎아준다고 트럼프가 공약한 만큼 일부 미국인에겐 세금 감면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관세는 미국 수입업자가 낸다. 수출업체, 수입업자가 이익을 줄여 감내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관세는 고스란히 가격에 전가돼 미국 소비자 부담이 된다.

트럼프에게 ‘관세는 다른 나라가 내는 세금’이란 믿음을 심은 건 ‘무역전쟁의 설계자’로 불리는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 담당 고문이다. “모든 나라가 미국에 물건을 팔고 싶어 하기 때문에, 미국은 관세를 부과해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런 주장을 철석처럼 믿는 트럼프에게 관세로 인한 인플레이션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얼마 전 상품가격 옆에 관세 인상으로 높아진 비용을 표시하려던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창업주에게 분노한 트럼프가 전화를 걸어 계획을 철회시킨 이유다.

트럼프에게 관세는 재정적자, 무역적자를 줄이고, 외국 투자를 끌어들여 미국 제조업을 되살려주고, 중국의 굴기를 꺾어줄 만병통치약이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의 정책기조를 ‘관주성(관세 주도 성장)’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오류가 있는 믿음에 기초한 트럼프의 관주성이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거다.

복잡다단한 국가 과제를 하나의 열쇠로 풀려 한다는 점에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도 트럼프 못지않다. 그의 만능열쇠는 정부 재정이다. 이 후보의 대표 성장 공약은 인공지능(AI) 산업에 대한 정부 주도의 100조 원 투자다. 평년보다 떨어진 쌀 등 농산물 가격은 정부가 예산에서 메워주겠다고 한다. 만 8세 미만에게 주던 아동수당을 18세 미만까지 대폭 늘리는 공약도 있다. 임금 삭감 없이 ‘주 4.5일 근무제’를 도입하는 기업도 정부가 지원하겠다고 한다. 하나같이 막대한 세금이 투입돼야 할 공약들인데, 나랏빚을 통제하기 위한 재정준칙, 정부지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구조개혁 같은 말은 쏙 빠졌다. 이 후보의 정책 공약을 관통하는 기조는 ‘재주성(재정 주도 성장)’이다.

이 후보 재정 집착의 연원을 따라가 보면 경기도지사 시절인 2020년 말 경기도 산하 경기연구원이 내놓은 보고서가 등장한다. 보고서는 문재인 정부 ‘코로나 1차 긴급 재난지원금’의 승수효과를 1.85로 분석했다. 4인 가족에게 100만 원을 줬더니 돈이 돌고 돌아 185만 원의 효과가 났다는 거다. 당시 경기연구원장이 지금 이 후보의 ‘경제 브레인’으로 불리는 이한주 민주연구원장이다. 당시 동일한 주제를 놓고 국책연구소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승수효과를 0.26∼0.36으로 낮게 평가했다. 100만 원 중 최대 36만 원만 쓰고, 나머지는 국민 통장에 쌓였다는 분석이다.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당시 소비심리에 영향을 미친 다른 경기부양책, 금융시장 상황 등 변수를 모두 고려한 KDI의 분석에 동의한다.

반면 이 후보는 1.85에 대한 믿음을 지켜온 것 같다. 틈만 나면 전 국민에게 25만 원씩 나눠주자고 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런 이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하면 전례 없는 재정 확대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AI, 반도체 등 국가의 미래를 위해 나랏빚을 내서라도 정부가 투자할 곳이 적지 않다. 하지만 고령 영세농이 논농사를 계속 짓게 지원하고, 업무시간을 줄인 기업에 지원금을 주는 게 얼마나 경제의 생산성을 높이고, 성장에 기여할 수 있겠나.

6·3 조기 대선을 27일 앞두고 이 후보는 나 홀로 전국을 돌며 유세하는 중이다. 후보 단일화 논의조차 끝내지 못한 보수 후보들의 대선 공약이 뭔지 아는 국민은 거의 없다. 양당의 공약 경쟁이 없어지니 공약의 타당성과 현실성, 재원 마련 방안에 대한 검증도 실종됐다. 최저임금을 올려주면 경제가 성장한다던 문 정부의 ‘소주성(소득주도 성장)’, 관세가 단박에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거란 트럼프의 ‘관주성’처럼 일반 경제 상식에 비춰 볼 때 성공하기 어려운 ‘재주성’ 실험이 이 땅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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