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홀로 앉아 ‘이형기 시전집’을 읽었다. 불도 안 켜고 모니터 불빛에 의지해 읽으니 마치 등불 아래 시를 읽는 옛날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천천히 읽다 후루룩 넘기기도 하다 보니 시인이 생전에 발간한 여덟 권의 시집은 물론이고 영면하기 전 발표한 몇 편의 시들까지 보게 됐다. ‘등짐’은 시인이 돌아가시기 1년 전인 2004년 ‘문학수첩’ 봄호에 발표한 작품이다.
아홉 번째 시집으로 묶이지 못하고 전집 끝자락에 낱낱이 묶인 시편들, 하늘에 뜬 가벼운 연 같은 시편들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노시인은 점점 가벼워지고 시는 더 자유로워지는 경지가 보였다.
사람들이 당신 짐이요 하는 것, 정작 시인은 “보기만 그렇지/짐은 무슨 짐” 심드렁한 어투로 말하는 것, 속을 헤집어 보면 “순두부 같은 것”이 가득 차 있는 것! 시인은 이것을 자신이 등에 지고 가는 “슬픔”이라 한다. 평생 내려놓을 수 없을 것 같은 이 커다란 등짐은 시인의 숙명을 생각하게 만든다. 모양은 없어도 무게는 한이 없어 시인이란 끝날 때까지 이 슬픔을 이고 지고 가는 사람이 아닐까. 쉽고 순한 언어로 닿을 수 없는 ‘도(道)’를 그려내는 시인의 내공이 놀랍다. 슬픔도 순두부처럼 희고 묽은 슬픔이기를, 생각하니 생각이 점점 많아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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