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모든 것은 농부 아버지의 임종과 함께 시작됐다. 아버지를 보내드리기 위해 내려온 고향땅에는 파란 창고와 곳간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부숴도 무방할 낡은 건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떻게든 그곳을 지켜내고 싶었다. ‘저곳을 고치고 부분 부분 새로 짓는다면 어떤 건축가에게 일을 맡겨야 할까.’ 조사를 하던 중에 건축가 조병수가 눈에 들어왔다. 자랑하듯 드러내는 건물이 아니라 주변에 조용히 녹아드는 건축을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가진 것과 갖고 싶은 것의 마음을 정리해 손편지를 썼다. 며칠 후 조병수건축사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첫 미팅에서 조 건축가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금쌀이라도 재배하시나봐요?” 그건 조롱이 아니라 따뜻한 관심과 호기심의 표현이었다.
그는 농가 주택에도, 재생 건축에도 애정이 많은 사람이다. 미국 몬태나에서의 유학이 많은 영향을 줬다. 나무와 철판으로 소박하게 지은 건물은 눈에 편했고 마음에도 이물감 없이 들어왔다. 천장 틈새로 들어온 엷은 빛이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도 잊히지 않았다. 영성의 빛은 종교 건축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설계비는 비쌌지만 어떻게든 조 건축가에게 맡기고 싶었다. 그가 힘껏 가격을 깎아준 덕분에 아버지의 창고는 두 번째 삶을 살게 됐다. 스테이와 카페로 운영되는 이곳의 이름은 ‘파란곳간’. 전북 부안군에 있다.
이 이야기의 화자는 맏딸 김서연 씨다. ‘파란곳간’에 다녀온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그곳에서의 시간이 그리움으로 남았다. 그 바탕에는 건축적 아름다움이 있다. 막사발에서 발견되는 ‘막의 미학’을 한국 미감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조 건축가는 튼튼한 나무 기둥 위로 골강판을 얹고 철문 대신 나무문을 달았다. 욕실 벽도 나무로 마감해 오두막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유리벽과 폴리카보네이트 사이에 소독한 볏짚을 빼곡하게 넣어 단열재 대신 사용하고, 마당에는 땅을 파 화로를 넣었다. 그 옛날 평상을 중심으로 온 식구가 한데 모여 수박도 먹고, 모기도 쫓으며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던 기억과 연결된 정서다.
하이라이트는 객실의 후면. 편백나무 노천탕에 발을 담그고 라운지체어에 등을 기대앉으면 드넓은 초록 들판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저 멀리 신작로를 따라 간간이 차가 지나고 그 너머로는 보드라운 능선의 내변산이 걸쳐진다. 조 건축가와 합을 맞춰 온 전용성 선생의 조경 솜씨도 인상적이다. 노천탕 앞으로 둔덕을 만들고 그 위로 잔디를 깔아 풍경에 리듬과 볼륨을 불어넣은 모습이라니…. 둔덕 앞뒤로는 큼직한 파초와 적당한 키의 남천, 가녀린 얼굴의 작은 꽃을 최소한으로 심었다. 일견 허름하고 소박한 건물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면 ‘큰’ 디자인과 감각, 무엇보다 시골과 자연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헤아리는 마음이 녹아 있다.
하나둘 찾는 사람이 늘면서 ‘파란곳간’은 조금씩 더 활기를 더해 가는 중이다. 서울에 있던 남동생 둘도 고향으로 내려와 쌀농사를 지으며 스테이 운영을 돕고, 쌀빵을 만든다. 매일의 삶에 어머니도 함께 있다.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산이 꼭 큰돈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삶의 풍경, 지키고자 하는 무언가가 마음속에 있고 그걸 위해 힘껏 달리기도 하는 삶의 태도 역시 부모가 줄 수 있는 귀한 유산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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