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초대석]“천리마 찾는 비법이요? 마방에서 함께 자며 보살피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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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년 7월 20일 2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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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9승 거두고 은퇴한 ‘현대판 백락’ 김영관 조교사

‘현대판 백락(伯樂)’ 불리는 김영관 조교사가 경주마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2004년 조교사에 입문해 지난달 은퇴한 김 조교사는 21년간 수많은 명마를 배출하며 한국 경마 역사상 최다인 1539승과 71번의 대상 경주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다. 그간 번 순위 상금만 906억 원에 이른다. 한국마사회 제공

한국 경마 역대 최다인 1539승, 대상 경주(일반 경주보다 높은 수준의 경주) 71승, 순위 상금 906억 원.

한국 경마계의 ‘살아있는 전설’ 김영관 조교사(65)가 21년간 거둔 성적이다. 김 조교사의 또 다른 별명은 ‘현대판 백락(伯樂)’이다. 춘추전국시대 때 천리마를 한눈에 알아본 백락처럼 수많은 명마를 찾아내 최고의 말로 키워내서다. 김 조교사는 후배들이 감히 깰 엄두도 내지 못하는 각종 기록을 세운 뒤 6월 말로 은퇴했다. 2004년 조교사로 입문해 21년간의 ‘즐거운 여정’을 마친 김 조교사를 17일 경남 김해 렛츠런파크 부산·경남에서 만났다.

―21년간의 조교사 생활을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원래부터 이렇게 잘할 것이라 생각했나.

“원래 기수로 시작했다. 그런데 몇 해 하다가 체중 조절도 힘들고 해서 잠시 사업 쪽으로 빠졌다. 하지만 결국 말을 잊지 못해 다시 마필관리사로 경마계로 돌아왔다. 이후 조교사가 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필기시험에 합격하면 실무에서 떨어지고, 실무를 통과하면 면접에서 낙방했다. 조교사가 되는 데 무려 15년이 걸렸다. 2004년 렛츠런파크 부산·경남이 새로 문을 열면서 막차로 조교사에 입문할 수 있었다.”

경마에서 조교사는 마주(馬主)와 위탁관리 계약을 맺고 경주마의 훈련과 관리, 출전 경주 설계와 전략까지 총괄하는 자리다. 프로야구나 프로축구의 감독과 같은 역할을 한다. 전국의 목장을 돌아다니며 성장 가능성이 높은 경주마를 발굴하는 스카우트도 겸한다.

―최고의 조교사라고 평가받는 요즘을 감안하면 시작은 미약한 편이었다.

“조교사가 됐을 때 나이가 40대 중반이었다. 당시 목표는 최고가 되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었다. 무한경쟁 체제였기에 자칫 성적을 내지 못하면 도태될 처지였다. 제발 대상 경주에서 단 한 번이라도 우승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은 경기 안양에 있는데 혼자 김해로 내려와 마방(馬房)에서 말들과 함께 먹고 자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당시 마방의 흙먼지와 풀 먼지를 너무 많이 들이마셔 지금도 폐가 좋지 않다.”

경마 기수-관리사-조교사 50년
지난달 은퇴 ‘즐거운여정’ 마쳐

마방에서 먹고 자며 명마 길러내
대상경주 71승, 순위상금 906억원

관리와 관심이 ‘천리마’ 만들어내
향후 인생도 경마에 도움 됐으면
―살아남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많이 했다던데….

“다른 사람들이 기본적인 건초를 먹일 때 나는 미국, 호주 등을 돌며 최고의 사료를 수입해서 먹였다. 지구력 증강제, 성격 완화제, 인대 강화제 등이 모두 포함된 사료였다. 우리 마방만의 편자도 개발했다. 하지만 말이라는 게 잘 먹이고 잘 훈련시킨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최고의 말이 되려면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예를 들자면 어떤 것인가.

“마방에서 먹고 자면서 말들을 유심히 관찰할 수 있었다. 겨울철이 되니 잘 먹은 말이 에너지를 달리는 데 쓰지 않고 털을 기르는 데 쓰더라. 추우니까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말들에게 따뜻한 옷을 입혔다. 여름철에는 모기, 파리 때문에 잠을 못 잤다. 나도 같이 모기에게 물리면서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얇은 옷을 만들었다. 어린 말들은 3세 정도부터 힘이 차면서 명마가 된다. 그런데 워낙 혈기가 왕성하다 보니 마방을 들이받거나 하는 등의 사고가 많이 난다. 말이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김영관 조교사(왼쪽)가  2019년 루나의 은퇴식을 치르고 있다. 오른쪽은 이성희 마주. 동아일보 DB
김영관 조교사(왼쪽)가 2019년 루나의 은퇴식을 치르고 있다. 오른쪽은 이성희 마주. 동아일보 DB

―조교사로서의 첫 우승을 ‘루나’라는 말로 이뤄냈다.

“루나가 있었기에 오늘의 나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루나는 선천적 장애가 있는 말이었다. 오른쪽 뒷다리를 질질 끌고 다녔다. 우리 마방 식구들이 뒷다리에 붕대를 감아 훈련을 시켰다. 소화 능력도 좋지 않아 숙성된 건초를 골라 먹여야 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일명 ‘똥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마방 식구들은 루나를 애지중지 아꼈다. 심장이 컸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 루나가 개장 경기에서 1등을 했고, 2005년 11월 내게 대상 경주 첫 우승을 안겨줬다. 젊은 시절 보잘것없던 내 모습이 투영돼 루나에게 더 애정을 쏟았던 것 같다.”

장애마로 태어난 루나는 마주들에게 외면당해 겨우 960만 원에 주인을 찾았다. 하지만 김 조교사의 헌신적인 보살핌과 체계적인 훈련 속에 13승을 달성하며 몸값의 74배를 벌었다. 2011년 개봉한 영화 ‘챔프’는 루나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제작됐다.

―루나의 성공 이후 미스터파크, 파워블레이드, 트리플나인, 즐거운여정 등 명마들을 줄줄이 키워냈다.

‘미스터파크’는 한국 경주마 최다 연승인 17연승 기록을 갖고 있다. ‘미스터파크’ 역시 초기에는 마주들에게 외면받던 말이었으나 김 조교사의 관리 속에 전설적인 명마로 재탄생했다. ‘파워블레이드’는 한국 최초의 통합 삼관마다. 최고 권위의 대통령배 4연패에 성공한 ‘트리플나인’은 한국 말로는 최초로 두바이 월드컵 결승전 무대를 밟았다. ‘즐거운여정’은 지난해 동아일보배 대상 경주를 비롯해 통산 9개의 대상 경주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하지 않나. 우승도 해본 말이 한다. 또 우승마를 키워 본 사람이 우승마를 또 배출한다. 좋은 성적이 나니까 마주분들이 더 좋은 말에 투자해서 맡겨 주시곤 했다. 2010년대 후반에 ‘뉴레전드’란 말이 있었다. 경매 입찰 때 마주분께 ‘이 말은 회장님을 위한 말입니다. 앞으로 대통령배에서 우승할 말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당시 역대 최고가인 2억9660만 원에 낙찰받았다. 뉴레전드는 2019년 대통령배에서 우승했다.”

지난해 열린 동아일보배 대상경주에서 우승한 즐거운여정과 김영관 조교사(왼쪽에서 5번째). 김 조교사 왼쪽은 선경래 마주.  동아일보 DB
지난해 열린 동아일보배 대상경주에서 우승한 즐거운여정과 김영관 조교사(왼쪽에서 5번째). 김 조교사 왼쪽은 선경래 마주. 동아일보 DB

―말 관상가로 유명한데 좋은 말을 감별하는 특별한 비결이 있나.

“조교사가 된 후 주로 김해에 머물렀고, 집은 안양에 있는데 사실 동네 지리를 잘 모른다. 하지만 제주도는 골목골목을 머릿속에 외우고 있다. 20년간 2주에 한 번씩 말을 보러 제주 곳곳을 다녔기 때문이다. 제주에서는 해마다 1000~1200마리의 말들이 태어난다. 제주에 갈 때마다 주요 목장을 돌며 새끼 때부터 유심히 관찰하고 기록했다. 말들이 2개월, 3개월, 6개월, 1년 동안 어떻게 커 가는지 지켜보는 것이다. 혈통도 물론 중요하다. 좋은 말에서 좋은 새끼가 태어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사람도 형제마다 능력이 별개이듯 말들도 마찬가지다. 명마의 새끼들을 어릴 때부터 꾸준히 관찰하다 보면 가능성이 큰 말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백락처럼 한눈에 척 보면 천리마를 알아보는 능력은 아니라는 건가.

“몇 해 전부터 사람들이 나를 백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백락이 누군지도 잘 몰랐다. 처음 조교사가 되었을 때 생존 자체를 걱정하던 내가 최다승 조교사가 된 건 꾸준함과 관리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사실 말을 보는 요령은 책에도 자세히 나와 있다. 그런데 정말 주의 깊게 관심을 갖고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건 천지 차이다. 정말 열심히 보다 보면 남들 눈에 안 보이는 게 보인다. 흔히 명마라고 평가받는 말들도 내 눈에는 발걸음이 둔탁하고 무거워 보일 때가 있었다.”

김영관 조교사와 경주마. 한국마사회 제공

―말을 볼 때 어떤 부분을 유심히 보나.

“혼자만의 착각일 수 있겠지만 말을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말의 내부가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말의 심장이 뛰는 게 눈에 보이는 것이다. 루나가 그랬다. 루나를 보고 있으면 거대한 심장이 용솟음치듯이 펌프질하는 게 느껴졌다. 1970년대에 한 해에만 25전 전승 기록을 세운 ‘에이원’이라는 명마가 있었다. 에이원은 심장이 큰 걸로 유명했는데 루나의 심장도 그렇게 크게 보였다. 말의 성격도 중요하다. 경주를 앞두고 긴장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대범하게 무리의 우위에 서는 말도 있다. 그런 모든 부분을 종합해서 말을 고른다.”

―남다른 승부욕을 갖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20년 가까이 다승왕을 했고, 거의 매년 50승 이상씩을 거뒀다. 하지만 2등이나 3등을 한 날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왜 졌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복기했다. 경주 하이라이트를 돌려 보고, 말이 경주에 나가기 전에 했던 모든 동작과 식사 메뉴, 루틴들을 새로 점검했다. 그렇게 절실하게 노력해서 다음 경기에 임했다. 한 번은 매번 1등을 하던 말이 갑자기 부진에 빠진 적이 있었다. 검은 눈동자를 유심히 보니 끈적한 눈물이 흐르고 있더라. 계속된 레이스에 피로하다는 의미였다. 며칠을 쉬게 하면서 잘 먹였더니 다시 눈동자가 말똥말똥해졌다.

1000m 경주 때 말이 몇 발자국을 뛰는 줄 아나? 아직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을 못 봤다. 150발자국을 뛴다. 1800m 장거리 때는 270발자국 전후다. 말이 그 발자국 수를 최고의 컨디션으로 뛰도록 하는 게 내가 해온 일이다.”

지난해 동아일보배 대상경주에서 우승한 즐거운여정. 이 말은 대상경주에서 무려 9번이나 우승하며 김영관 조교사의 즐거운 여정과 함께 했다. 동아일보 DB
지난해 동아일보배 대상경주에서 우승한 즐거운여정. 이 말은 대상경주에서 무려 9번이나 우승하며 김영관 조교사의 즐거운 여정과 함께 했다. 동아일보 DB

―향후엔 어떤 인생을 계획하고 있나.

“기수로 시작해 마필관리사, 조교사에 이르기까지 50년을 말과 함께 살았다. 처음 조교사가 됐을 때 ‘루나’를 만났고, 은퇴를 앞둔 몇 년간은 ‘즐거운여정’과 함께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던 조교사이던 내가 21년간의 즐거운 여정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나를 믿어 주신 마주분들, 훈련시킨 말을 타 준 기수분들, 옆에서 함께해 준 마방 식구들이 있었다. 일단은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생각이다. 그래도 말과 함께해 온 인생처럼 앞으로도 말과 같이 호흡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싶다. 어떤 일이든 조금이나마 한국 경마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

김영관 조교사(65)
△전남 무안 출생
△2004년 3월 조교사 데뷔
△통산 전적 7054전 1539승(1위)
△대상 경주 우승 71회
△최우수 조교사 13회
△2022년 영예조교사 선정
△대표 말: 루나, 미스터파크, 파워블레이드, 트리플나인, 즐거운여정 등

#한국 경마#김영관 조교사#대상 경주#명마 발굴#마필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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