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속의 성찰[이준식의 한시 한 수]〈336〉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0월 2일 2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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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로 책상을 옮기고, 옷깃 풀어 서늘한 밤공기를 맞는다.

별 총총해서 낮엔 더울까 걱정되는데, 이슬 짙으니 연꽃 향기는 한결 그윽하다.

개구리는 울음 울다 다시 멈추고, 거미줄은 사라졌다 또 번뜩인다.

한창 ‘추흥부(秋興賦)’를 읊조릴 즈음, 서쪽 담장에 드리우는 오동나무 그림자.

(傍水遷書榻, 開襟納夜凉. 星繁愁晝熱, 露重覺荷香.

蛙吹鳴還息, 蛛羅滅又光. 正吟秋興賦, 桐景下西牆.)―‘여름밤(하야·夏夜)’ 위장(韋莊·약 836∼910)


시인은 여름밤의 정경을 배경으로 자연 속에서 마음의 평온을 만끽한다. 더위를 피해 물가에 앉아 밤의 서늘한 기운을 즐기면서 다채로운 풍경들을 마주한다. 총총한 별빛과 풍성한 이슬, 연꽃 향기, 개구리 울음, 달빛에 번뜩이는 거미줄, 담장에 드리운 오동나무 그림자. 풍경이 다채롭다기보다는 시인의 감각이 섬세하고 정밀하다고 해야 할까. 자연과의 교감과 내면의 평화, 이는 분주한 현대인에게도 유효한 위로와 영감을 선사한다. 마음의 여백을 경험하고 자기만의 고요를 누릴 수 있는 길이기에 더 그렇다. 이 시가 단순한 풍경시를 넘어 시인의 성찰과 사유의 응집체라 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추흥부’는 위진 시대 반악(潘岳)이 지은 노래다. 벼슬길이 험난했던 그는 이 노래에서 위험에 노출되는 고관대작이 되기보다는 장자를 본받아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을 누리겠노라 천명한다. 혼란이 극심했던 오대 시대 재상까지 지낸 위장이 추흥부를 읊조린 의도가 각별하게 느껴진다.

#여름밤#자연풍경#마음의 평온#별빛#연꽃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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