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이바라키현 쓰쿠바시에서 23년째 방문 진료를 하는 히라노 구니요시 원장은 자신을 ‘임종 의사’라고 부른다. 그가 지금껏 임종을 지킨 환자는 약 3000명에 이른다. 지난달 24일 만난 히라노 원장은 “수련의 시절엔 환자를 단 1분이라도 더 살리는 게 의사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보내는 생의 마지막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걸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이어가는 환자들을 보며 깨달았다”고 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그 순간의 가치를 높이자’는 게 임종기 환자를 대하는 히라노 원장의 제1원칙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노인 1000만 한국, 품위 있는 죽음을 묻다’ 시리즈를 통해 둘러본 덴마크, 영국, 대만 등 6개국 노인과 전문가들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들 국가는 생의 마지막을 어디서 어떻게 보낼지 개인 의사를 존중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정부는 재택의료, 호스피스 등 촘촘한 생애 말기 지원 정책으로 가족의 부담을 덜고, 품위 있는 노년을 지원했다.
“살던 곳에서 늙고, 죽고 싶다”
품위 있는 죽음의 첫 단계는 가족과 함께 세우는 임종 계획이다. ‘임종-돌봄 평가’에서 세계 1위로 평가받는 영국은 2009년 임종에 관한 대화를 장려하는 ‘다잉 매터스 캠페인’을 시작했다. 2005년 사망자가 출생아보다 많은 다사(多死) 사회에 진입한 일본도 2018년부터 가족과 사전 돌봄 계획(ACP)을 세우는 ‘인생 회의’를 장려하고 있다. 생의 말기 돌봄과 의료 계획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세워야 본인과 가족 모두 큰 혼란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의 결과가 선진국에서 보편화된 에이징 인 플레이스(Aging in Place)다. 살던 곳에서 늙고, 임종을 맞는다는 의미다. 덴마크는 70대 이상 노인 55%가 집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 배경엔 1937년 산모와 신생아, 1958년엔 노인 대상 방문간호를 시작할 만큼 활성화된 재택의료 인프라가 있다. 싱가포르는 공공아파트에 노년 돌봄센터를 설치해 방문 간호, 병원 연계 서비스를 제공한다. 재택 임종 케어도 일반화된 싱가포르에선 노인 97%가 집에서 여생을 보낸다.
이들 나라에선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권리도 폭넓게 인정한다. 아시아에서 연명의료 거부 제도가 처음 도입된 대만은 말기 환자, 극중증 치매 등 현 의료 수준으로 회복 불가능한 환자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다. 희소병을 앓던 어머니의 단식 존엄사 과정을 곁에서 지킨 비류잉 대만 중산대 의대 교수는 “어떤 종류의 사랑은 손을 놓아 주는 것이란 걸 알게 됐다”고 했다. 2002년 세계 최초로 안락사가 합법화된 네덜란드에서 만난 한 60대 유가족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서 해방돼 손을 맞잡고 함께 떠난 부모님의 행복한 마지막 모습을 영원히 기억한다”고 했다.
재정과 인력 문제, 한국은 준비됐나
임종-돌봄의 질이 높은 국가들도 고민은 있다. 연간 31만 명이 호스피스를 이용하는 영국은 고령화로 인해 완화의료 수요가 매년 약 10%씩 늘어나고 있지만, 정부 예산 증가는 그에 못 미친다. 후원만으론 운영이 어려워 문을 닫는 시설도 생기고 있다. 일본도 재정 부담이 커지자 재택의료 본인부담금을 점차 높여 왔다. 대도시와 지방의 의료 격차, 간병인 등 돌봄 인력 부족 등은 취재진이 방문한 모든 국가의 공통된 고민이다.
한국은 2020년부터 사망이 출생보다 많은 다사 사회에 진입했다. 지난해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1000만 명이 넘었고, 치매 인구도 약 100만 명에 이른다. 그러나 상당수 노인은 노후가 두렵다. 가족의 간병 지옥을 걱정하고, 낯선 병상에서 차가운 의료기기에 의존하다가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품위 있는 죽음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다. 국민이 각자도생에 이어 각자도사(各自圖死)까지 걱정하지 않도록, 정부와 사회가 적극 나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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