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상훈]‘가뭄 물그릇’ 하나 마련 못하는 한국 정치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9월 7일 23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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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정책사회부장
이상훈 정책사회부장
한국 경제 개발 역사는 인프라 건설의 역사다. 고속도로와 원자력발전소만큼 조명받진 않지만, 절대 과소평가할 수 없는 핵심 인프라가 전국 곳곳의 댐이다. 1970년대 준공된 소양강댐과 팔당댐이 수도권 2000만 주민 생활과 공업의 젖줄 역할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수도권 시민이 소양강댐 팔당댐 물에 의존하는 현실을 보면, 선인들의 선견지명이 놀랍다.

하지만 댐 건설, 치수(治水) 사업은 언제부턴가 환경 파괴 논란과 지역 반발에 막혀 왔다. 2000년 이후 국내에 건설된 댐은 군위댐, 김천부항댐, 성덕댐 등 한 손으로 꼽을 만큼 적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은 홍수 방지, 수자원 확보라는 의미가 있었지만, 한반도 대운하 구상이 무산되자 대체로 추진된 사업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임기 내 완공을 위해 22조 원을 들여 밀어붙인 강한 추진력도 논란의 독이 됐다. 좌우 진영 간 극단적 정치 논쟁은 치수 사업의 상수가 된 지 오래다.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 대책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이는 강원 강릉시 가뭄은 단순한 기후 변화 문제가 아니다. 한국 물 정책의 민낯이다. 비다운 비가 내리지 않으면서 오봉저수지 저수율은 10%대 초반까지 떨어졌다. 일부 아파트 단지에서는 단수가 현실로 나타났다. 주민들은 제대로 씻지도 못하는 고통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 가을에 이런 가뭄이 찾아왔다는 게 큰 문제다. 그동안 한반도 가뭄은 보통 봄에 나타났다. 전년도 장마 때 저수지와 댐을 채운 물은 가을, 겨울에 쓰고 봄에 부족해진다. 장마 전에 비가 오지 않아 나타나는 가뭄이 그간의 일반적 패턴이었다. 장맛비가 내리면 가뭄이 자연스레 해결됐다. 가을 가뭄은 이런 자연 해갈을 기대하기 어렵다.

강릉은 동해안을 대표하는 도시이지만, 상수원 취약성은 오래전부터 지적됐다. 한강 같은 큰 강이 없으니 취수원이 마땅찮다. 1990년 평창에 도암댐을 건설했지만, 태백산맥 자락 고랭지 채소밭과 축사에서 흘러든 오폐수로 수질 오염이 심각해 사실상 버려져 왔다. 관리를 강화해 쓰자는 지적도 있지만, “댐 자체를 해체하자”는 주장도 여전하다. 댐 상류 곳곳에 있는 오염원 문제는 2000년대 초부터 지속돼 왔지만, 해결은커녕 댐 가동을 막는 방식으로 방치해 왔다.

2015년 충남 서북부 지역의 극단적 가뭄 때는 금강 백제보 도수로를 짓는 대응책이라도 펼 수 있었다. 물론 4대강 정비로 풍족해진 물이 있었기에 끌어다 쓸 수 있었다. 강릉에는 대체 수원도 마땅치 않다. 도암댐을 둘러싼 논란은 20년이 넘도록 한 발짝도 진전되지 않았다. 그사이 주민들의 고통은 커지고 있다. 비가 오면 어찌어찌 넘어가는,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 방식 말고는 손쓸 방법이 마땅찮다는 뜻이다.

백년대계 손도 못 대는 韓 민낯


가뭄이 오면 정부는 소방차, 헬기를 동원하며 다양한 대책을 쏟아 내지만, 비만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용두사미가 된다. 대규모 다목적댐 건설이든, 지하 댐 논의든, 기존 댐 재활용이든 근본적 대책은 진전이 없다. 물 문제는 결국 누군가의 희생을 보상하고 100년 앞을 내다보며 해결해야 하는데, 이를 조정하고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야 할 정치는 갈등만 부추기며 아무것도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 강릉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특정 지역의 단순한 기후 문제가 아니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한국 사회 민낯의 축소판이다. 지금처럼 정치가 백년대계를 외면하고 갈등에만 매몰된다면 오늘의 강릉은 내일의 수도권과 반도체 공장이 될 수 있다. 물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정부와 정치권이 무슨 문제에 손을 댈 수 있겠나.

#한국 경제 개발#인프라 건설#댐#수도권#치수 사업#환경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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