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은주]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알게 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9월 11일 23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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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 선행에 동기 의심해 깎아내리는 이들
연구 결과 ‘친사회 행동’ 접하면 공감 사고 ↑
미담 접하면 ‘돈쭐’ 내는 게 한국인의 온기
위안-선행 확산하려거든 행위 널리 알려야

이은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은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벌써 한 달 가까이 지났지만, 광복절 80주년을 맞아 가수 션이 마라톤 대회를 주도하고 이를 통해 기업 후원금과 개인 참가비로 조성한 23억4000만 원을 독립유공자 후손 가정을 위해 전액 기부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션은 직접 마라톤에 참여해 풀코스의 2배에 이르는 81.5km를 8시간여에 걸쳐 완주했는데, 발톱이 6개나 빠졌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칭찬받아 마땅한 선행을 하고도 자신의 입으로 이를 알리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이른바 ‘진정성’이 훼손될까 우려해서다. 달리 말하면 다른 사람의 선행을 알게 되었을 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면의 숨은 동기와 계산을 넘겨짚고, 행위 자체를 폄하하려는 시선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치인이나 연예인처럼 대중의 평가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혹은 기업과 단체가 이미지 세탁을 위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지원을 제공했다 치자. 비록 동기가 불순했더라도 그들의 도움으로 결식아동들이 따뜻한 한 끼를 먹을 수 있었다면, 쪽방촌의 1평 남짓한 방에 깨끗한 벽지가 도배될 수 있었다면 충분히 박수쳐 줄 만하지 않은가?

국제학술지 ‘발달 심리학’에 실린 한 연구는 미디어를 통해 타인의 ‘친사회적 행동’을 접하게 되면 어떤 효과가 발생하는지를 검증했다. 친사회적 행동은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행한 자발적 행동’으로 정의했다.

72건의 연구를 메타분석한 결과, 미디어에서 다른 사람의 도덕적 행동을 접하면 친사회적 행동이 증가하고 공감적 관심이 높아진 반면, 공격성은 감소했다. 다만 이러한 효과는 미디어 유형이나 친사회적 행동의 종류 및 대상에 따라 달라졌다. 게임처럼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미디어에 비해 TV나 영화처럼 수동적으로 메시지에 노출되는 경우 효과가 더 컸다. 또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타인에 대해서만 긍정적 효과가 발견됐다.

아울러 기부나 자원봉사보다는 공감적 사고, 즉각적 도움 제공 등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드는 경우 유의한 효과가 나타났다. 배곯는 어린 남매에게 치킨을 무료로 제공한 사장님의 사연을 접하면 단체주문, 선결제 등으로 ‘돈쭐’을 내주는 우리 국민들은 평균 이상의 따뜻한 마음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미디어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효과는 정서적 고양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예컨대 영화 속 등장인물이 자비, 감사, 희생, 친절 등의 미덕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정서적 고양감을 느낀다. 이러한 감정은 자신 역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고, 타인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선행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타인의 친절한 행위를 다룬 뉴스가 범죄 뉴스 노출에 따른 부정적 효과를 상쇄하는 완충 장치로 작동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살인, 아동성범죄 등 흔히 봄 직한 흉악한 뉴스만 시청한 사람들에 비해 해당 뉴스에 이어 자원봉사, 기부, 노숙인 돌봄 등 타인의 선행을 보도한 뉴스를 접한 사람들은 부정적 감정을 덜 경험했다. 나아가 더 높은 수준의 고양감과 인간성에 대한 신뢰, 기부 의향을 보였다.

‘기승전 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하면서 위세가 다소 줄었으나 최근까지도 온갖 사회악의 근원으로 집중포화를 맞곤 했던 소셜미디어 역시 친사회적 행동의 확산에 일조할 수 있다. 국제학술지 ‘정보, 커뮤니케이션과 사회’에 실린 연구에서는 대학생들로 하여금 비영리재단의 영상을 공개적으로 혹은 익명으로 페이스북에 공유하도록 하고, 이후 오프라인에서 관련 행사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거나 기부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연구 결과, 공개적 영상 공유가 익명 공유에 비해 오프라인 참여 행동을 촉진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러한 차이는 평소 소셜미디어에서 사회문제 관련 활동을 별로 하지 않던 학생들에게서 발견됐다. 클릭 몇 번이면 충분한 온라인의 손쉬운 참여 행위가 정작 오프라인에서의 실천을 줄인다는 ‘슬랙티비즘(slacktivism·느슨한 행동주의) 가설’과는 다른 결과다.

그러니 소리 소문 없이 우리 사회의 그늘을 밝혀 왔던 분들은 부디 자신의 일을 널리 알려 주시길 부탁드린다. 38년간 쪽방촌 무료 진료를 이어온 요셉병원, 용돈을 털어 폭염 속 노점상 할머니가 파시는 농작물을 사 드린 중학생…. 그런 이들의 이야기를 접하며 우리는 이 세상에 매관매직하는 권력자나 정치적 동지를 성추행하는 파렴치한, 평생 모은 전세금을 떼먹는 사기꾼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작은 위안을 얻고, 인간에 대한 희망을 그나마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광복절#션#마라톤#독립유공자#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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