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정원을 갖게 되면 유실수를 심고 싶어져요. 사과며 살구며 따 먹고 싶잖아요. 그런 것에 대한 로망이 있고. 하지만 거기까지. 유실수는 가급적 심지 마세요.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절대 안 열리거든요. 조그맣게 열렸다가 또 금방 떨어져 버리고. 열린 게 자두인지 살구인지도 모른다니까요. 농약을 안 치고도 성공하는 건 베리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유실수는 키도 어마어마하게 자라요. 높이 자란 키만큼 땅 밑으로 뿌리가 있다고 생각하면 돼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땅 밑의 양분을 다 가져가겠죠? 다른 식물이 자랄 수가 없어요. 그런 환경에서도 유일하게 잘 자라는 게 맥문동이에요. 그래서 공원에 맥문동이 많은 거죠. 100평이고 200평이고 따로 구획해 유실수만 심을 것이 아니라면 추천하지 않습니다. 배수가 안 좋으면 뿌리도 빨리 썩고 병충해도 많아 정원 초보자가 결코 관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에요.”
강원 인제군 ‘찍박골정원’ 김경희 대표의 말은 귀에 쏙쏙 박혔다. 김 대표 남편 김철호 씨에게 “(아내가) 말씀을 너무 잘하시네요. 일타 강사 같아요”라고 하자 그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실제로 일타 강사였어요.”
부부는 12년 전 이곳에 정착했다. 시동은 남편이 걸었다. 아내와 함께 입시학원을 운영하던 김 씨는 “산속에 살고 싶다”며 지금의 땅을 구입했다. 이후 터를 잡고 나오지 않았다. 결국 아내도 이삿짐을 쌌다. 김 대표의 어머니는 찍박골에 처음 왔을 때 땅을 휙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기 돈 들이지 말아라.” 이어지는 ‘일타 강사’의 부연 설명. “1970, 80년대 부동산으로 재미를 본 분이거든요. 척 보니 돈이 될 성싶지 않았던 거예요.(웃음)”
어머니의 명령을 거부하고 김 대표 부부는 이곳에 돈과 땀, 시간을 퍼부었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에 집을 지은 뒤 땅을 갈고, 잔디를 깔았다. 꽃과 나무를 심고, 암석정원과 개울정원을 포함해 총 9개의 정원을 만들었으니 그 좌충우돌 ‘대환장’이 오죽했을까. 하지만 결국 그 실패를 동력 삼아 부부는 성공을 거뒀다. 수많은 초보 가드너들이 가드닝 클래스를 듣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군청에서 자랑 삼아 손님을 모시고 오는 지역 명소이기도 하다.
찍박골정원에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있었다. 안내 푯말이 없어 그저 감으로 올라가야 하는 오르막길엔 큼직한 꽃송이를 단 목수국이 도열하듯 이어졌고, 9개의 정원은 높고 낮은 단차를 두고 퍼즐판처럼 어우러졌다. 집과 마당이 있는 고지에 서서 주변 풍광을 바라보니 저 멀리 강원도의 늠름한 산들이 굽이굽이 조용한 거인처럼 우뚝했다. 남편 김 씨가 했던 말이 새록하다. “처음 이곳에 와서 3, 4년은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쌓이니 몸도 점점 회복되더라고요. 서울살이가 힘들잖아요.”
미국 월가 고액 연봉자들의 꿈이 은퇴하고 자신의 와이너리를 갖는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 자연에 파묻혀 ‘돈독’ 빼는 것을 꿈으로 삼는 인생이다. 정원 역시 와이너리와 다르지 않다. 치유된 내가 새롭게 써 내려가는 챕터, 새삼 느끼는 희로애락, 그리고 건강한 하루하루와 삶에 대한 이해. 정원에서 자라고 여물어 가는 가장 큰 열매는 나 자신일 것이다. 그러니 굳이 유실수는 심지 않아도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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