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애란원에서 김모 양(18·왼쪽)이 이숙영 애란원 원장과 함께 아이를 보며 대화하고 있다. 위기 임산부 출산지원시설인 애란원에서 심층상담을 받았던 김 양은 아이를 입양기관에 보낸 뒤 사흘 만에 다시 찾아와 현재 아이를 양육하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어릴 때부터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이모 양(18)은 학교를 자퇴한 뒤 잠시 사귀던 20대 남성의 아이를 덜컥 가졌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부모는 이 양에게 폭언과 폭행을 이어갔고, 아이 아빠와는 연락이 끊겼다.
아이를 지우긴 싫었지만, 출산 기록이 남고 혼자 키우는 것도 이 양에겐 큰 부담이었다. 다행히 임신부가 익명으로 진료를 받고 출산할 수 있는 ‘보호출산제’를 알게 돼 최근 아이를 낳았다. 이 양은 “엄마 품을 떠나보내 미안하지만, 아이가 나보다 나은 인생을 살기 바란다”고 했다.
9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신생아 유기와 아동 방임을 막기 위해 지난해 7월 시행된 ‘위기임신 보호출산제’를 통해 지난 1년간 아이 299명이 안전하게 태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올 6월까지 관련 기관에서 상담을 받고 직접 아이를 키우기로 결심한 산모는 160명이다. 107명은 보호출산을, 32명은 출생신고 후 입양을 보냈다. 복지부 관계자는 “보호출산을 원했던 19명은 상담을 받고 마음을 바꿔 아이를 직접 키우기로 했다”고 말했다.
보호출산제가 아동 유기, 출생 신고를 하지 않는 ‘유령 아동’ 발생을 막고 있지만 위기 임신부를 지원할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도미향 남서울대 아동복지학과 교수는 “더 적극적인 상담과 지원으로 위기임신 여성이 자녀 양육을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보호출산제가 양육 포기 수단으로 활용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보호출산제 1년, 299명 안전출산 숙려기간 길수록 자녀 애착 커져… 다른 엄마-아이 보며 육아 결심도 “익명 출산 부추기는 제도는 곤란… 위기임신 막을 근본적 대책 절실”
“예비 신랑이 결혼을 앞두고 바람을 피워 파혼했어요. 뱃속 아이는 14주가 넘어서 낙태하지 못하는 상황이에요. 저 좀 도와주세요.”
최근 서울시 위기임산부 통합지원센터에 20대 여성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헤어진 남자친구는 아이를 책임지지 않겠다고 하고, 혼자 낳아 키울 자신도 없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여성은 센터 소개로 보호출산을 선택했고 출산 후 일주일의 숙려기간 동안 아이를 직접 양육할지 고민했다. 이후 아이를 보호기관에 맡기며 “준비되지 않은 채 너를 맞이해 미안하다”는 마지막 편지를 남겼다. 위기임신 보호출산제는 아이를 키우기 어려운 임산부가 가명으로 출산할 수 있게 한 제도다.
● 숙려기간 길어지면 양육 의지 커져
지난달 27일 통합지원센터에서는 상담사 2명이 위기임산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산이 임박한 응급 전화를 받으면 직원이 방문해 거처 마련 등 출산 과정을 돕는다. 상담사 10명이 3교대로 근무하며 24시간 365일 대기한다. 센터 관계자는 “위기임신 여성은 절벽에 내몰린 것과 같다. 때를 놓치면 낙태, 아동 유기, 아이 아빠의 가정폭력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위기임신 보호출산제는 2023년 수원 영아 살해 사건 등 아동 유기 사건이 잇따르자 정부가 지난해 7월부터 긴급히 시행했다. 경제적 이유 등으로 아이를 양육할 수 없는 임신부가 숙박시설, 공중화장실 등에서 출산하지 않도록 산모와 아이를 모두 보호하려는 취지다.
지난달 27일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애란원에서 김모 양(18·왼쪽)이 이숙영 애란원 원장과 함께 아이를 보며 대화하고 있다. 위기 임산부 출산지원시설인 애란원에서 심층상담을 받았던 김 양은 아이를 입양기관에 보낸 뒤 사흘 만에 다시 찾아와 현재 아이를 양육하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보호출산을 선택하려면 반드시 센터에서 대면으로 상담해야 한다. 센터 인근 위기임산부 지원 시설인 ‘애란원’도 방문한다. 이숙영 애란원 원장은 “도저히 아이를 키울 수 없어 보호출산을 선택한 산모도 보호시설에서 엄마와 아이가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꾸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애란원에서 만난 김모 양(18)도 같은 사례다. 그는 임신한 뒤 아이를 ‘베이비박스’(부모가 아이를 두고 가도록 마련된 상자)에 맡길 생각이었으나 센터 등에서 심층상담을 받은 뒤 보호출산을 선택했다. 이후 아이를 입양기관에 보냈지만 사흘 만에 직접 키우기로 마음을 바꿨다. 김 양은 “숙려기간은 일주일 정도다. 통상보다 좀 더 긴 2개월의 숙려기간을 거쳤고 아이에 대한 애착이 더 커졌다. 출산 전에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너무 두려웠는데, 이젠 아이와 떨어지는 게 더 견딜 수 없다”고 했다.
● “위기임신 막을 근본적인 대책 필요”
보호출산이 유기될 뻔한 생명을 지키지만 보완할 점도 많다. 현장에서는 ‘보호출산이 익명 출산을 부추기는 제도가 돼서는 안 된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 원장은 “지방자치단체 등에선 ‘보호출산을 선택하면 아이는 키우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안내한다”며 “출산 전후 적극적인 상담으로 엄마가 아이를 포기하지 않도록 지원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위기임신 여성을 지원하는 다양한 제도적 안전판도 필요하다. 임산부는 미성년자, 배우자 및 가족 단절, 장애 및 경제적 자립 불가 등 다양한 이유 때문에 위기임신 상담을 받는다. 하지만 출산한 뒤 사후관리를 하지 않으면 이후에도 다시 보호출산을 선택할 수 있다. 유미숙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부대표는 “정부가 아동 보호를 위해 보호출산제를 서둘러 시행했지만 위기임신이 왜 생기는지, 재발을 막으려면 어떤 지원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고 지적했다.
보호출산으로 태어난 아동이 부모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다는 점도 논란이다. 프랑스도 부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으나 정책을 바꿔 자녀의 요청을 받으면 친모의 동의를 거쳐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2003∼2022년 요청을 받은 친모 3분의 2가량은 정보 제공에 동의했다. 독일에서도 법원 판결을 통해 친모 이름 등 출생 정보를 알 수 있다. 도미향 남서울대 아동복지학과 교수는 “여성의 익명 출산 권리도 중요하지만 아동이 자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최소한의 정보는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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