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법으로 막힌 위장수사, 마약조직 ‘꼬리’만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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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수사 위법”… 잡아도 공소 무효, 아동 성착취물 수사만 유일 허용
점조직화에 공급사범 검거 힘들어… 美-獨-佛 등 ‘언더커버’ 폭넓게 허용
관련법안 1년 넘게 국회서 낮잠

최근 국내 한 마약수사대는 텔레그램에서 필로폰 등을 거래하는 조직의 드로퍼(전달책)를 붙잡았다. 수사대는 그를 정보원으로 삼아 윗선을 추적하고자 했다. 중간 공급책은 “신원을 확인하겠다”며 신분증과 가족관계증명서, 주민등록등본을 요구했다. 하지만 현행법상 검경이 마약 수사를 위해 위장 신분증을 발급하는 건 불법이어서 수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관은 “제도적 뒷받침 없이 마약범죄 윗선을 추적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마약 사범이 늘고 있지만, 위장 수사(언더커버)를 허용하지 않는 현행 법제 탓에 꼬리만 잡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직 마약 수사관 10명 중 9명은 언더커버를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관련 법안은 국회에 1년 넘게 계류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 수사관 10명 중 9명 “언더커버 필요”

22일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은 ‘마약류 범죄 대응 방안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 경찰과 검찰, 관세청 소속 마약수사관 202명을 설문한 결과를 공개했다. 응답자 189명(93.5%)이 “위장 수사 제도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설문에 참여한 한 경찰관은 “현재 허용되는 수준의 위장 수사는 최말단 배달책 외엔 검거하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현행 형사소송법 등에는 위장 수사와 관련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 다만 2007년 대법원 판례에 따라 “범죄 의사가 없는 사람에게 범죄를 저지르게 유도하는 건 ‘함정수사’로 위법하다”는 기준만 제시돼 있다. 이에 따라 설령 언더커버로 범인을 붙잡아 기소해도 공소 자체가 무효가 된다. 유일한 예외가 아동 성착취물 수사다. 2021년 청소년성보호법 개정으로 언더커버 허용 조항이 추가돼, 수사기관이 이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마약 사범은 2021년 1만626명에서 2024년 1만3512명으로 늘었다. 올해 1∼8월에는 9047명이 검거됐다. 눈여겨볼 점은 올해 검거된 이들 중 공급 사범이 3316명으로 그 비율이 36.7%에 그쳤다는 점이다. 지난해(40.0%)보다 비율이 오히려 낮아졌다. 경기 지역에서 마약을 수사하는 한 경찰관은 “마약 거래가 점조직으로 분화하면서 공급책을 잡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대구경찰청은 이례적으로 마약 조직의 총책을 포함해 57명을 일망타진했다. 조직 측이 신분증을 요구하지 않은 허술한 점 때문이었다. 수사에 참여한 한 경찰관은 “이번 경우는 위조 신분이 필요 없었지만, 오프라인 거래 등으로 들어가 경찰이 아님을 위장하려면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관련법은 국회에 1년 넘게 계류

정부와 국회도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지난해 8월 국회엔 언더커버를 허용하는 마약류관리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정부도 올 3월 ‘제1차 마약류 관리 기본계획’을 통해 “연내에 가짜 신분증 등을 활용한 잠입 수사를 제도화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22일 현재 관련 법안 3건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법안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에 부쳐진 이후 진전이 없는 것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발의된 법안의 차이를 조율해 단일안을 만들 예정”이라며 “위장 신분이 허용되면 공급책 검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해외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은 법무부 장관이 마련한 가이드라인을 근거로 언더커버를 폭넓게 허용한다. 독일과 프랑스 등도 형사소송법상 마약 같은 중대범죄에는 언더커버를 합법화했다. 영국과 호주 등도 판례에 따라 언더커버를 시행하고 있다. 대체로 사전 허가나 사후 감사 등 장치를 두고 인권 침해 여부를 감시한다.

법제 정비가 늦어질수록 마약이 생활 공간에 더 깊숙이 파고들 수 있는 만큼 언더커버 허용을 고려할 때가 됐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배상균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언더커버 면책 규정을 법에 명시해 실효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흥희 남서울대 국제대학원 글로벌중독재활상담학과 교수는 “말단 배달책만 잡아서는 근절이 어렵고 공급책, 생산 제조책, 총판매책 등 윗선 검거를 통해 확산 고리를 차단해야 마약 투약 나이 하락과 일상 속 침투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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