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처방 외엔 진료받을 곳 없어
영양 주민, 지역서 쓴 진료비 15%뿐
“지역의사제로 의료공백 감당 못해
몇개 郡 묶어 의료행정구역 설정을”
지난해 12월 전북 장수군보건의료원에서 노승무 원장(오른쪽)이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이 의료원은 올해 공중보건의사 9명 중 6명이 전역을 앞두고 있어 응급실과 소아 진료 차질이 우려된다. 장수=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지난해 12월 전북 장수군의 장수보건의료원 앞. 거동이 힘든 남편을 부축한 조모 씨(79)가 서둘러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 남편은 최근 서울에서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건강이 급속히 악화됐다. 전날부터 심한 복통을 호소했는데, 의료원에서 입원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고 전주의 종합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조 씨는 “동네 사람들 다 병을 달고 사는데, 장수에서는 간단한 약 처방만 받고 한 시간 넘게 걸려 전주까지 간다”고 했다.
의사와 병원이 부족한 지방에서는 이처럼 ‘원정 진료’를 다니는 일이 다반사다. 12일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전국 군(郡) 지역 81곳 중 39곳(48.1%)은 인근 대도시나 수도권으로 원정 진료를 떠나는 비율이 50%가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경북 영양군, 경남 산청군 등과 같이 지역 내에서 진료비를 20%도 쓰지 않는 곳이 14개나 됐다. 이는 2024년 시군구별 주민의 입원·외래 내원 일수와 진료비를 의료기관 소재지별로 분석한 결과다.
● 경북 영양 주민 진료비 15%만 지역에서 써
장수군 인구는 지난해 말 2만922명으로 전국 229개 시군구 중 세 번째로 적다. 이 중 40.8%(8529명)가 65세 이상이다. 당뇨와 근골격계 질환 등 만성질환을 달고 사는 주민이 상당수지만 의사는 턱없이 부족하다. 당장 올해부터는 의료원 응급실도 문을 닫을 위기다. 현재 응급의학과를 전공하지 않은 공중보건의사 4명이 응급실에서 근무 중인데, 다음 달이면 2명이 전역해 야간 당직 근무가 어려워진다. 노승무 장수군보건의료원장은 “지난해 전공의(인턴, 레지던트)와 의대생들이 대거 현역으로 입대하면서 공보의 신규 충원이 어려워졌다”고 했다.
군청이 있는 장수읍을 벗어나면 주민들의 의료 이용은 더 막막하다. 취재팀이 각 면에 있는 보건지소 3곳을 둘러봤지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공보의가 요일을 정해 순회 진료를 하거나 방문 진료를 위해 자리를 비우기 때문이다. 계북면 주민 손정숙 씨는 “보건지소는 의사가 없는 날이 대부분”이라며 “가족들은 차로 30분 거리의 진안군의료원에 간다”고 말했다.
인구 소멸 지역의 상황은 대체로 비슷하다. 공보의를 제외하고 민간 의사가 2명뿐인 영양군에서는 주민들이 진료비의 46%를 안동 등 경북에서, 18%를 대구에서, 21%를 서울 등 다른 지역에서 썼다. 강원 양양, 고성군 등에서도 주민들이 진료비의 약 85%를 다른 지역에서 사용했다. 강원에서는 11개 군 중 8곳이 원정 진료를 떠나는 비율이 50%를 넘었고 전북은 8곳 중 5곳, 경북도 12곳 중 7곳이 의료 이용의 절반 이상을 다른 지역에 의존했다.
● “의대생-전공의 지역의료 경험 늘려야”
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대 증원과 함께 지역의사제, 공공의대 도입 등을 추진하고 있다. 10∼15년가량 특정 지역에 의무 근무하는 의사를 양성해 지방의 의사 구인난을 해소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지역의사제 등이 의사 부족 문제의 근본 해결책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오주환 서울대 의대 의학과 교수는 “현재 설계 중인 지역의사제로는 취약지 근무를 강제할 수 없다”며 “몇 개 군 단위로 ‘의료 행정구역’을 만들어 해당 지역에 근무할 의사를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지역 의료 현장을 지키는 의사들은 “인구 2만∼3만 명인 인구 소멸 지역에선 상주 의사를 무리해서 늘리기보다는 권역 내 자원을 활용해 의료 공백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백환 진안군의료원장은 “일본은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 소재 대학병원 의사들이 수천 명씩 권역 내 의료 취약 지역으로 파견을 가거나 순회 진료를 한다”고 했다.
의대생과 전공의가 지역 의료에 관심을 갖도록 취약지 진료 경험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이상현 영양병원장은 “만성질환 관리를 위해선 수련을 끝내지 않은 일반의만 있어도 된다. 대구의 큰 대학병원에서 전공의 일부만 경북 취약 지역으로 파견을 보내면 지역에선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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