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칩 오는데, AI 인프라는 부실] 〈하〉 GPU 활용할 전력 확보 시급
“전력 인프라 구축에만 최소 6∼7년”… 이미 있는 데이터센터 가동도 벅차
해외 ‘원전복귀’ 속 韓 홀로 ‘감원전’… 지방→수도권 송변전 시설도 부족
수도권 집중 데이터센터 분산 필요
통신 대기업 A사는 올 3월 서울 소재 데이터센터를 확충하기 위해 40MW(메가와트)의 전기 사용 신청서(전력계통영향평가서)를 산업통상부(현 기후에너지환경부)에 냈다. 하지만 8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부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상태다. 정부 관계자는 “기업들의 요구량에 비해 전력량이 부족한 데다, 특히 수도권은 전력 포화 상태라 더더욱 허가가 어렵다”고 전했다.
엔비디아가 한국에 최신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 장을 공급하기로 했지만 국내에 이를 활용할 전력 인프라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들 GPU는 대부분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건설에 사용할 예정인데, 이들은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릴 만큼 전력 소비량이 막대해서 지금의 전력 공급 능력이나 송전망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보다 전력 생산 규모를 획기적으로 늘리지 않을 경우 비싼 비용을 들여 GPU만 들여놓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4일 정보통신기술(ICT) 업계에 따르면 엔비디아의 최신 GPU 26만 장을 활용하는 데 필요한 전력량은 2.7∼4.4TWh(테라와트시)로 추산된다(GPU 26만장 활용 위해 필요한 312∼499MW 데이터센터를 1년 내내 풀가동했다고 가정). 이는 인구 20만 명인 신도시 두 곳이 1년간 쓰는 전력량과 비슷한 정도다. 또 하이퍼스케일(100MW급) 데이터센터 3∼5개 규모에 해당한다. 업계 관계자는 “GPU 26만 장을 소화하려면 데이터센터를 비롯해 관련 전력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최소 6, 7년은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처럼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지만 현재 전력 인프라로는 새로운 GPU를 받아 구동하기는커녕 이미 설치된 반도체 공장과 데이터센터를 돌리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8월 이후 데이터센터 활용을 위해 한국전력에 전력계통영향평가를 신청한 318건 가운데 최종 통과된 사업은 6.6%인 21건(9월 말 기준)에 그쳤다. AI 산업 발전으로 기업들의 전력 수요는 폭증하고 있지만 정작 전력 생산량이 이를 받쳐주지 못하면서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송전망 등 전력 인프라도 부실하다. 현재 수도권은 전기가 부족하지만 원자력, 태양광, 화력 등 발전소를 대규모로 돌리는 경북, 전남, 강원 등의 지역은 전기가 남아돌고 있다. 그런데 막상 이들 지역에서 만든 전력을 수요가 많은 수도권으로 보낼 송변전 인프라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올해 한전의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포함된 총 54건의 송·변전 설비 건설사업 중 55%(30건)가 지연 또는 지연 예상 상태인 것으로 집계됐다. 전력 인프라의 부실 문제는 열공해나 전자파 등을 우려한 지방자치단체의 반대 여론 때문에 더 악화되고 있다. 최근 대학이나 기업, 기관에서 설립을 추진하는 AI 데이터센터는 해당 지역 주민들의 민원에 부딪쳐 보류 또는 무산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에 따라 수도권에 집중된 데이터센터 수요를 지방으로 분산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또 이재명 정부가 대선 공약으로 내건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등 관련 인프라 건설이 속도를 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는 전남 등에서 생산한 전력을 사업비가 높고 지역 민원이 많은 육로 대신 해저 케이블로 수도권까지 보내는 사업이다.
● AI 시대 각국 원전 복귀하는데 한국만 나 홀로 ‘감원전’
AI가 막대한 전력 수요를 촉발하고 있지만 한국의 전력 공급 정책은 역주행하고 있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과거 환경 우려로 탈원전을 추진했던 해외 주요 국가들이 AI 시대에 맞춰 앞다퉈 원전 복귀를 선언하고 있지만 한국은 나 홀로 ‘감원전’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79년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 이후 50년 가까이 대형 원전 사업에 나서지 않다가 최근 정책 방향을 180도 바꿨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원자력 르네상스’를 외치며 2050년까지 원자력 발전 용량을 4배로 늘리겠다고 공언했다. 스위스는 2030년 원전 사용을 종료할 계획이었지만 2023년 원자로 4기의 계획 수명을 10년 연장했다.
하지만 한국은 정반대 행보를 걷고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설비 용량을 연 100GW로 확대하겠다는 감원전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포함된 신규 원전 2기의 건설 논의 역시 12차 계획에서 수정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이미 ‘9분 능선’을 넘은 고리 원전 2호기 재가동 결정도 미루고 있다. 9월과 10월 두 차례 회의에도 계속운전 허가 여부가 결정되지 않았다. 한국은 2029년까지 대형 원전 10기의 설계 수명이 만료되는데 계속운전이 중단되면 2030년에 서울시 한 해 전력량을 웃도는 전력 공백이 우려된다. 원전 10기 발전량은 59.7TWh로 서울시 한 해 전력 사용량(2024년 기준 50.4TWh)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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