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재영]33세 젠슨 황을 부른 29년 전 이건희 편지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0월 31일 23시 20분


코멘트
15년 만에 한국을 찾은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한국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지난달 30일 ‘깐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소맥 러브샷을 하며 “한국 프라이드치킨이 최고”라 했고, 엔비디아 그래픽카드 ‘지포스’ 한국 출시 25주년 행사에선 “모든 것은 한국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그는 “e스포츠, PC방, PC 게이밍 문화가 없었다면 오늘의 엔비디아도 없었을 것”이라며 29년 전 한국과의 첫 인연을 소환했다.

▷황 CEO는 “1996년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매우 아름다운 편지를 받았다”고 했다. 그는 “발신인은 편지에서 ‘한국에 대한 세 가지 비전이 있다’고 썼다”고 했다. 한국 전역을 초고속 인터넷으로 연결하고 싶다. 비디오 게임이 한국 기술 성장을 이끌 것이다. 세계 최초의 비디오 게임 올림픽을 열고 싶다…. 이 꿈을 위해 황 CEO가 도와달라고 발신인은 제안했다. 황 CEO는 “그 편지 때문에 한국에 처음 오게 됐다”며 “제이(이재용 회장)의 아버지가 보낸 편지였다”고 털어놨다. 당시 54세였던 고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었다.

▷편지를 받은 황 CEO는 33세의 청년 엔지니어에 불과했다. 그의 엔비디아는 창업 4년 차의 신생 기업이었고, 그래픽카드 개발 실패로 파산 위기에 몰려 있었다. 이 선대회장이 꿰뚫어 본 엔비디아는 1999년 지포스를 선보이며 일어섰고, 여기에 삼성전자의 D램이 들어가며 양사의 협력이 시작됐다. 이 선대회장의 비전도 현실이 됐다. 초고속 인터넷으로 한국은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이 됐고, 게임은 한국의 대표 산업으로 성장했다. 비디오 게임은 ‘e스포츠’로 인정받아 각종 국제 대회가 열리는 것은 물론이고 아시안게임 정식종목까지 됐다.

▷두 거인의 인연은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와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1983년 당시 이미 태블릿PC를 구상하던 잡스는 부품 공급 가능성을 타진하려 반도체 후발 업체 삼성을 찾아왔고, 73세의 이 창업회장이 직접 그를 맞았다. ‘미래는 모바일에 있다’고 설파하는 28세 청년의 이야기를 들은 이 창업회장은 “잡스는 IBM에 맞설 인물이 될 것”이라 평했다고 한다. 모바일 패권을 둘러싼 삼성과 애플의 협력과 경쟁의 역사는 여기에서 시작됐다.

▷아이들의 장난 같던 게임에서 인공지능(AI) 기술이 꽃피웠듯, 멀리 내다보는 선견지명과 이를 이루기 위한 꾸준한 실천이 미래를 만들어낸다. 허황되게 보이는 꿈을 알아주는 지음(知音)도 필요하다. 엔비디아와 ‘AI 동맹’을 맺고 글로벌 AI 혁명에 올라탄 한국이 쫓아가기에 급급하지 않고 미래를 주도하려면 다음을 내다보는 상상력과 혁신이 필요하다. 거인의 어깨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다.

#젠슨 황#엔비디아#이재용#삼성전자#정의선#현대차#이건희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