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문병기]한미 관계에 드리운 미국발 ‘문화전쟁’의 그림자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8월 31일 23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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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기 정치부장
문병기 정치부장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첫 한미 정상회담이 마무리됐다. 정상회담 직후 이뤄진 여론조사를 보면 대체로 호의적이다. 이 대통령을 ‘친중·반미’로 보던 트럼프 행정부 일각의 시선 속에 부담이 클 수밖에 없는 첫 대면에서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회담을 마친 것에 대해 인상적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그런 평가와 별개로 이번 회담은 어두운 그림자처럼 미묘한 불안감을 남겼다. 트럼프 대통령은 왜 회담을 3시간 앞두고 “한국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숙청이나 혁명(purge or revolution) 같다”는 글을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을까.

해프닝으로 보기 어려운 트럼프의 SNS

트럼프 대통령은 이 글을 올린 배경을 두고 “한국의 새 정부가 최근 며칠 동안 교회에 대해 매우 잔인한 압수수색을 벌이고 심지어 우리 군사기지까지 들어가 정보를 수집했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이에 이 대통령은 “미국 군대를 직접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군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오해였다고 생각한다”며 물러섰다.

하지만 회담 이틀 뒤인 지난달 27일(현지 시간)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은 워싱턴타임스에 보낸 기고문에서 “이 대통령이 종교적, 정치적 자유에 공격을 이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법치주의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는 데 향후 몇 주가 중요할 것”이라고도 했다.

깅그리치의 기고문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최고위층 인사와 백악관 참모 일부가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해 기울어진 인식을 갖고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깅그리치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전략을 조언하는 핵심 측근으로 꼽힌다. 이른바 ‘깅그리치 사단’으로 분류되는 인물들도 다수가 백악관과 트럼프 주변에 포진해 있다. 깅그리치 개인 회사의 부사장 출신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연설문 작성자를 거쳐 현재 백악관 국내정책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빈스 헤일리 등이 대표적이다. 현재 백악관 신앙자문위원회 의장인 폴라 화이트케인은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선고 직후 참석한 한 종교 행사에서 “한국에서 정치적 도전이 심각하지만 전 세계가 함께 기도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각에선 과거 이들이 특정 종교 행사에 참석했던 점을 들어, 해당 종교 단체에 대한 수사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이들의 주장이 종교의 자유 등을 명분으로 내건 문화전쟁의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강력한 보수주의로의 회귀를 내걸고 ‘공화당 혁명’을 이끈 깅그리치는 낙태와 성소수자, 이민자 등에 대한 다양성 정책을 비판하는 이른바 ‘문화전쟁(culture war)’의 기획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한 외교 소식통은 “탄핵 정국에도 트럼프 대통령에게 지원 메시지를 요청하는 탄핵 반대 단체들의 로비가 이어졌지만 한미 동맹에 미칠 파장을 우려한 참모들이 이를 가로막았다”며 “하지만 이들이 종교의 자유를 명분으로 앞세우면서 분위기가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대형 악재 되기 전 적극 대응해야

실제로 친트럼프 마가(MAGA) 진영은 종교나 민주주의 가치를 명분으로 다른 나라 정치 상황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J D 밴스 부통령이 올 초 독일 총선을 앞두고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극우 정당을 지원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오해’라고 물러선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국내 정치 상황을 언급하고 나선다면 한미 관계에 미칠 파장은 만만치 않을 수 있다. 문화전쟁의 먹구름이 한미 동맹을 삼키기 전에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야 한다.

#이재명#트럼프#한미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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