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인공지능(AI) 투자의 90% 이상은 민간기업이 한다. 데이터센터와 전력, 연구개발(R&D), 인재 육성과 같은 인프라 투자를 늘려 국가적 AI 투자 매력을 높이는 일은 정부의 몫이다. 여기에 투자의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는 건 민간기업의 역할이다. 연매출 10조 원을 넘긴 한국의 간판 빅테크 회사 네이버가 ‘소버린 AI’(자국 AI) 개발을 위해 정부에 손을 벌리는 건 한국 AI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뜻이며, 그간 자신들의 AI 농사도 실패했다는 걸 자인하는 일이다.
AI 주권론은 검색 주권론 판박이
미국 오픈AI의 대화형 AI인 챗GPT의 하루 한국인 활성 이용자는 330만 명을 넘었다. 네이버는 2023년 거대언어모델(LLM) 기반 대화형 AI 모델 ‘하이퍼클로바x’를 선보였지만 존재감은 아직 미미하다. 하이퍼클로바x조차 ‘사용자가 몇 명이냐’는 질문에 “베타 버전이기 때문에 초기 사용자 수는 제한적”이라고 답한다. 네이버가 실력을 입증했다면 정부에 손을 벌리기 전에 국내외 민간 자본의 투자가 쇄도했을 것이다.
네이버 AI 개발을 주도한 하정우 전 네이버 퓨처AI센터장은 ‘모두의 AI’를 공약한 이재명 정부의 초대 AI미래기획수석이 됐다. 하 수석은 “미국 데이터로 학습한 AI를 쓰면 미국 가치관에 편향된다”고 주장한다. 한글과 우리 데이터로 학습한 자국 AI는 필요하다. 하지만 ‘김치를 한국 고유 식품’이라고 제대로 답하는 자국 AI를 확보하더라도 제대로 된 모델이어야 한다. 실력이 부족해 다른 나라에서 쓰이지 않으면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자국 AI와 같은 기술 주권론은 1990년대 통신 시장 개방 압력이 거셀 때는 ‘통신 주권론’으로, 2000년대 구글 등의 공세 앞에서는 ‘데이터 주권론’ ‘검색 주권론’으로 변주됐다. 기술 주권을 위한 투자와 보호막이 필요하다고 해도 산업 생태계를 위협하는 독과점 폐해까지 용인할 수 없다. 1999년 창업한 네이버는 포털이라는 울타리를 치고 검색과 콘텐츠 서비스를 제공하며 광고 등의 수수료로 큰돈을 벌었다. 동시에 수많은 창작자와 콘텐츠 기업을 폐쇄적인 ‘포털 동물원’의 하청업체로 전락시켰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네이버는 6월 다른 빅테크 AI가 자사 데이터를 긁어가지 못하도록 크롤링(온라인상 데이터 수집)을 차단하는 기술을 적용했다. 그러면서도 자국 AI 생태계의 한 축인 한국 콘텐츠 대접에 인색하다. 네이버는 허락 없이 AI 학습에 콘텐츠를 활용해 놓고 비용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네이버는 7월 WBL(월드 베스트 LLM) 챌린지 사업을 위한 그래픽처리장치(GPU) 임차 사업자로 선정됐다. 8월에는 국가대표 AI 모델 개발 경쟁에 나설 ‘독자 AI 파운데이션(기초) 모델 사업 정예팀’으로 뽑혔다. 탈락한 회사들 사이에서 “네이버 병풍만 서고 있다”는 불만이 나온다. 시장에선 자국 AI를 명분으로 한 정부의 세금 퍼붓기가 네이버의 손실 만회용 프로젝트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있다. 네이버 내부에서도 “국민투표로 1, 2등을 가리는 미인대회 방식으로 시장 경쟁력 있는 주권 AI를 만들 수 없다”는 걱정이 있다.
투자 사회화, 수익 사유화는 없어야
미국은 민간의 AI 모델에 강점이 있다. 중국은 AI 기술을 로봇 등 산업 현장에 응용하는 ‘통용 AI(通用人工智能)’에 역점을 두고 있다. 후발 주자인 한국이 AI 3대 강국으로 올라서려면 특정 기업, 특정 모델 의존도를 줄이고 한국 AI 산업 생태계를 성장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네이버도 과거와 같은 폐쇄적 플랫폼 모델부터 바꿔야 한다. 정부 지원으로 개발한 AI 모델을 이용해 광고 등의 수수료로 돈을 버는 ‘AI 동물원’을 다시 만든다면 투자는 사회화하고 수익은 사유화하는 일이다. 모두를 위한 AI가 네이버를 위한 AI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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