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나라 일본의 교육열도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일본의 한 닭고기 광고. 아버지가 모는 차 안에서 수험 공부를 하는 자녀의 모습. 유튜브 캡처
“부모와 일가친척들이 자식이라는 경주마에게 엄청난 돈을 베팅하는 거지. 그 베팅에는 돈뿐만 아니라 부모의 시간, 정보력, 노동력, 사교력, 여가까지 모두 들어가.”
잠실동 사람들(정아은 지음)
그 ‘경주마’인 나도 중3 겨울방학부터 본격적인 시합 준비에 나섰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서 뛰는 것은 아니었다. 주변엔 이미 수학의 정석은 기본이고 수1까지 끝낸 친구도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중학교 내신도 힘들어서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었다.
학원 등록을 위해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대치동에 갔다. 가는 길에 차창 너머로 바라본 강남은 영화 장면처럼 휙휙 바뀌었다. 번화가인 압구정 로데오와 직장가인 삼성동의 코엑스, 트레이드 타워를 지나니 노란 아파트들이 즐비한 대치동이 나타났다. 거대한 은마상가는 마치 좁은 입시의 문을 지키는 수문장 같았다.
많은 학원 중 S 학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도 출연했던 K 원장의 수학 강의는 독특했다. 한 반에 100명의 학생이 K 원장의 수업을 들었다. K 원장은 매주 정석 책에서 한 문제씩 시험을 냈다. 문제를 틀린 학생들은 K 원장이 휘두르는 각목에 허벅지를 5대씩 맞아야 했다. 맞고 나면 허벅지에 멍이 시퍼렇게 들었다. 체벌이 금지된 요즘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
대치동의 밤은 낮보다 화려하다. 학원 수업이 끝난 뒤 몰려나온 학생들과 이들을 태우러 온 학부모 차량으로 붐비는 모습. EBS 유튜브 캡처 안 맞으려면 문제 풀이를 통째로 암기해야 했다. 수학이 약했던 나는 늘 시간이 부족했다. 이런 날 위해 어머니는 차를 몰고 대치동 학원에 태워다 주셨다. 나는 살기(?) 위해 차 안에서 책을 붙들고 있었다. 바깥 풍경을 볼 여유는 없었다. 어머니의 차를 타고 학원에 가는 길은 늘 우울했다.
돌이켜보면 어머니의 ‘라이딩’이 마냥 나빴던 건 아니었다. 사춘기의 자녀와 부모가 그렇듯 가족 간 대화가 줄어들던 시기였다. 집에서는 늘 내 방문을 잠그고 지냈다. 그러나 차 안에선 도망칠 곳이 없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기에 어머니와 1평 남짓한 차 안에 있다 보니 대화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내게 궁금한 게 많았다.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주변 친구들은 어떤지. 대화의 끝은 종종 훈수와 잔소리로 변질돼 서로 언성을 높이곤 했다. 중요한 건 모자간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또한 자녀에게 다가가려는 어머니의 노력이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중3 겨울을 끊임없이 학원에 다녔던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성적이 반등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고2 때 이과에 적응하지 못해 성적은 다시 수직으로 하락했다. 대치동 학원에 다닌다고 모두 성공하는 건 아니었다.
때로는 극성이라고 손가락질받기도 하지만 자식의 교육을 뒷바라지하는 부모의 모습 또한 사랑의 표현 아닐까. 유튜브 캡처최근 방송인 이수지 씨가 유튜브 채널에 올린 ‘대치맘(대치동 엄마)’을 패러디한 ‘도치맘’ 영상을 보니 그 시절이 생각났다. 과한 조기교육을 풍자한 영상이지만, 내 눈에는 예나 지금이나 자식 교육을 향한 어머니들의 한결같은 마음이 보였다.
어느덧 나는 애 아빠 직장인이 됐다. 요즘은 내가 어머니를 차에 태워 병원이나 공항에 바래다 드린다. 더 이상 나는 차 안에서 문제를 풀 필요도 없고, 어머니의 잔소리도 기분 나쁘지 않다. 어머니와 나는 여전히 시시콜콜한 대화를 자주 나눈다. 자녀 교육을 위해 늘 헌신하셨던 어머니. 이제 아들인 내가 ‘라이더’가 될 차례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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